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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t

-내가 되게 어른인 줄 알았거든.











지훈이 깨어난 것은 이제는 슬슬 아침에 가까워지는 새벽이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지난 번 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니엘은 끝까지 지훈의 곁에 남아 있어 주지는 않았다. 시트가 구겨진 흔적과 이불 속에 남은 체온이 아니었다면, 어젯밤의 그 순간들은 모두 꿈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흔적이 못내 아쉬워, 지훈은 한참이나 멍하니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벌써 이틀이나, 드러누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제는 일어나야 했다. 지훈은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이나 앓아서인지, 그게 아니라면 어젯밤 제 체온을 나눠준 사람 때문인지, 그래도 몸이 한결 가벼웠다. 지훈은 바닥으로 내려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무심결에 핸드폰을 열어 액정을 확인했다.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제는 뭘 부탁해도 다 들어줄 것 같았는데. 사진이라도 한 장 같이 찍자고 할 걸. 못내 아쉬워,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또다시 그에게서 그런 무른 모습을 볼 수 있기는 한 걸까.


“기회가 있겠지.”


지훈은 애써 그렇게 중얼거렸다. 몇 번이고 일부러 고개를 젓고, 지훈은 며칠 만에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까운 순간을 너무 쉽게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아쉬움은, 영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살 빠졌다 혹은 얼굴이 안됐다 는 것이 주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아프다더니, 정말 많이 아팠나보다는 말들에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지훈은 수업을 마치고 졸지에 이틀이나 결근을 해 버린 그린 게이블스로 갔다.

사장은 웃는 얼굴로 지훈을 맞아 주었다. 그녀 역시도, 첫 인사를 아팠다더니 얼굴이 핼쓱해졌다는 말로 대신했다. 가뜩이나 비쩍 말라가지고, 빠질 살이 어딨어서 거기서 또 빠지느냐고, 누구는 살이 안 빠져서 난리인데 누구는 살이 자꾸 내려서 야단이니 어쩌면 좋으냐는 그녀의 말에, 지훈은 힘없이 웃었다.

사장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한 대기업 계열사인 카페 체인에서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부근에 카페가 몇 개인데 그 중 하필이면 우리 가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그녀의 부언에 지훈은 가만히 눈을 숙여 그 시선을 피했다. 그거 아마도 저 때문인 것 같다는 말까지는 차마 나오지 않아서.


“그래서, 결정은 하신 거예요?”
“응, 뭐.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사장의 얼굴은 착잡했다.


“인수 조건이 이상하리만큼 좋아서, 솔직히 버틸 이유가 없네. 너한테 미안하지.”
“아뇨,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되레 자신에게 미안해 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입맛은 썼다. 그린 게이블스에서 일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커피에 대해 애착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첫 가게를 이런 식으로 접게 만든 것이 아무래도 자신인 것 같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씁쓸했다.


“카페 넘기시면, 뭐 하실 거예요?”
“글쎄. 어디 여행이나 좀 갈까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아르바이트 자리는 구했어?”
“아뇨.”


지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부터 찾아보려고요.”
“내가 너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인수 조건에 너 아르바이트 계속하게 해달라고 말은 해봤었는데.”
“안 된다죠?”
“응.”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는 알바 없이 전부 정직원 고용을 하는 게 원칙이라나. 학업 중인 학생은 아무래도 곤란하다고.”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그 이유가 아니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 카페에 인수 제의가 들어온 것부터가 자신 때문이었을 터이므로.  


“근데, 괜찮으세요?”


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페 일, 좋아하셨잖아요.”
“좋아했지. 지금도 좋아하고.”


그녀는 웃었다. 그들 사이에는 며칠 전 개시한 벚꽃라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훑어내는 그녀의 손끝은 어쩐지 착잡해 보였다.


“근데, 무서워.”
“네?”
“그린 게이블스 개업한 지가 1년 조금 넘었는데, 그 시간 동안 제일 절실하게 느낀 게 그거야. 세상 참 무섭다는 거. 적은 나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세상은 참 무섭다는 거.”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라떼 한 모금을 빨아마셨다.


“나는 있잖아, 지훈아. 내가 되게 어른인 줄 알았거든.”


지훈은 멍하니 눈을 들어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보다 스무 살 남짓 많은 것은 확실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보통 정도 터울이 지는 여동생이 있다면 아마 꼭 사장 정도의 나이가 아닐까, 지훈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에 대해 가지는 근거 없는 친밀감은, 아마 그런 것에서부터 기인하는지도 몰랐다.


“어른이시잖아요.”


지훈은 웃었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끝이 길지 못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이제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고, 겁먹지도 않고, 그냥,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런 멘트나 치면서, 그렇게 설렁설렁 잘 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거든. 40 넘으면 무조건 그렇게 되는 건 줄 알았어. 설날 돼서 떡국 먹고, 나이 한 살 두 살 먹다 보면 별다른 노력 안해도 무조건 그렇게 되는 줄 알았지.”
“….”
“근데, 아냐.”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린 게이블스 하면서 내가 느낀 게 두 갠데, 하나는 내가 참 그간 편하게 살고 있었구나 하는 거야.”
“….”
“미생에서 그러잖아. 회사가 전쟁이면,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난 그 회사 다니면서 정말 나름대로 고생 많이 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새삼 힘들거나 놀라거나 할 일 같은 거 없을 줄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 난 그간 참 편하게 살고 있었던 거였어.”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어머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남의 돈 먹기는 쉽지 않고, 그보다 더 쉽지 않은 것이 남에게 뭔가를 파는 거라고. 그녀가 다니던 회사는, 지훈의 학교에서는 감히 서류전형도 통과하기 힘들다고 공공연히 말할 만큼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아무래도 대학가 앞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지금보다는 안락했을 것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
“사는 게 안 무서운 순간 같은 건, 영원히 안 온다는 거야.”


그 말은 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어서, 지훈은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렇잖아. 학교 다닐 땐 시험 치는 게 무섭고, 방학 끝나는 게 무섭고, 친구랑 싸우는 게 무섭고. 어른만 되면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울 거 같잖아. 근데 안 그렇잖아. 스무 살이 되면 스무 살이 무서운 게 있고, 서른 살이 되면 서른 살이 무서운 게 있고, 마흔 살이 되니까 마흔 살이 무서운 게 있어. 그러니까.”
“….”
“쉰 살이 되면, 쉰 살이 무서운 게 또 어디선가 짜잔, 하고 나타나겠지.”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들은, 아직은 어린 지훈이 실감하기에는 쉽지는 않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아마, 앞으로 맞게 될 그 수많은 날들의 어느 모퉁이에서, 자신이 분명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 것을 지훈은 믿었다. 그녀의 말에는 그런 울림이 있었다.


“그럼.”


지훈은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나이에 뭔가가 무서운 건, 되게 당연한 거겠네요.”
“그렇지.”


사장은 웃었다.


“젊으면 겁이 없다 그러는데, 그것도 다 옛날 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무 살 스물한 살 이렇게 먹었을 땐 세상에 무서운 것 밖에 없었던 것 같아.”


거기까지 말해놓고,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뭐 무서운 게 있어?”
“네.”
“뭔데? 물어봐도 돼?”
“원래는 사람…이었는데요.”


혹시나 맞닥뜨리게 될까 봐, 그 눈에 마주치게 될까 봐 무서웠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게 무서웠다.


“지금은.”
“지금은 뭐.”


그녀는 테이블 너머 웃는 얼굴로 지훈을 흘겨보았다.


“연애라도 하니?”


그걸, 연애라고 불러도 되나. 그 부분에 지훈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공식적으로, 자신을 미워해서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있다는 그 말을 번복한 적이 없었다. 겨우 하룻밤, 그 품에 기대 잠든 기억만으로 이런 불완전한 관계에 ‘연애’라는 이름을 붙여도 괜찮은 것일까.


“진짜 하나 보네, 연애.”


사장은 다시 한 번 웃었다.


“뭐 내가 자꾸 아르바이트 빠지고 할 때 짐작은 했지만.”


할 말이 없어, 지훈은 머쓱하게 웃었다. 탁자 너머에서 그런 지훈을 바라보며, 사장 또한 말없이 한참을 웃었다.


“좋을 때 실컷 좋아해. 연애도 다 때가 있어. 때 지나면, 어지간한 용기로는 못해. 나이 먹는다는 게 다른 게 아냐. 마음에 굳은살이 앉는 거지. 굳은살이 덕지덕지 앉아서, 어지간한 걸로는 그 굳은살을 뚫고 못 들어오는 거야. 그렇게 되기 전에, 좋은 사람 있으면 실컷 좋아해.”


지훈은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별다른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다니엘이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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