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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r

-손만 잡고 잘게.











시간은 아주 느리게도 가다가, 아주 빠르게도 갔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누워야지, 하는 기분으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 후로는, 도통 열에 들떠 앓은 기억밖에 없었다. 한 번씩 잠에서 깰 때마다 시간은 한 시간 후였다가, 한 시간 반 후였다가, 서너 시간 후였다가를 반복하며 흘러갔다. 배가 고프기보다는 목이 말라, 지훈이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침대 아래로 내려섰을 때는, 이미 저녁 여섯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핸드폰으로는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그 목록을 훑어보고서야, 지훈은 오늘 자신이 하루 종일 앓았음을 실감했다. 지훈은 가장 최근에 걸려온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그린 게이블스의 사장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걱정스레 묻는 그녀에게, 지훈은 제가 오늘 몸살이 나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앓느라 전화를 드리지 못했다고,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차가운 바닥을 한 발 디딜 때마다 온 몸의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팠다. 설설 기듯 밖으로 나와 지훈은 냉장고에 든 물 한 잔을 가까스로 따라 마셨다. 하루종일 앓은 탓일까. 물에서는 단맛이 났다. 찬 물 한 잔을 채 다 마시지 못하고 지훈은 컵을 아무렇게나 식탁에 내려놓은 후 다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멍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걸터앉아, 지훈은 걸려온 부재중 전화 목록을 살펴보았다. 그린 게이블스 사장이 세 통,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의 전화가 두 통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다니엘에게서는 한 통의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뭘 바래.”


제 풀에, 지훈은 피식 웃었다.

전화라도 할까.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과한 다정함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 비서라는 사람과 통화할 때만큼이라도, 아프냐고, 괜찮냐고, 한 마디만 듣고 싶었다. 아무리 못되어도,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아픈 사람이 부탁하면 그 정도야 해주지 않을까도 싶었다. 그래서 지훈은 부득부득 연락처를 뒤져 다니엘의 번호를 띄웠다. 한 번도 그 쪽에서 다정한 전화가 걸려온 적이 없었던 그 번호를.


“….”


그러나 지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에야말로, 차가운 말을 들으면 그지없이 서러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네가 아픈데,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냐는 말이라도 들으면 어떡하지.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은 그랬다. 꿋꿋하게 못들은 체 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뭐라든, 어떤 표정을 짓든, 그 옆에서 뻔뻔하게 떠들어댈 자신이 없었다. 그가 내는 생채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그랬다가는, 정말로 상처받아 버릴 것만 같았다.

이틀이나 입고 있어서 그런지, 옷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다시 눕든지 말든지 해야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하룻밤을 잤지만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지, 이상하리만큼 배는 고프지 않았다. 대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밥을 챙겨먹을 엄두 같은 건 도저히 나지 않았다. 지훈은 냉장고를 뒤져, 전에 사 두었던 떠먹는 요거트 몇 개로 배를 채우고 다시 누웠다.

나름 독한 몸살이었다. 이렇게 독한 몸살은 일전에 그게 어떤 일인지도 모르고 택배 상하차 일을 하러 갔다가 된통 앓아누운 이후 처음이었다. 어깨며 허리며 팔 다리가 전부 푹푹 쑤셨다. 제 살이 제 살이 아닌 것 같았다. 바싹 말라붙은 입 속으로 넘어가는 침이 끈적거렸다. 으슬으슬한 오한에 이불을 목까지 둘러쓰고 꽁꽁 움츠렸다. 그래도 추웠다. 추울 날씨는 아닌 것 같은데도.

만 하루 내내 아무 것도 안하고 잠만 잤는데도 잠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토막토막 들었다 깨는 잠 속에서, 지훈은 간간히 다니엘의 얼굴을 보았다. 가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기도 했고, 가끔은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눈으로 지훈을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번인가 두 번인가는, 마치 리플레이라도 보는 것처럼, 별장 침대에서 함께 뒹굴었던 장면들이 보였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온 몸이 쨍하게 울려, 몇 번이나 지훈은 잠에서 깼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그래도 보고 싶었다.










잠결에 몇 번이고 손등으로 이마를 대어 보았다. 이 살이나 저 살이나 똑같이 제 살이라, 열이 얼마나 나는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은 가물가물했고 귀도 멍멍했다. 바싹 말라붙은 입 속은 모래알이라도 씹는 것 같았다. 눈꺼풀이 따끔거리고 화끈거렸다.

그래서, 꿈인 줄만 알았다.


“이봐.”
“….”
“이봐.”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지훈은 한참을 웅얼거리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똑바로 잡히지 않아 그는 한참이나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멍해졌다.

여기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한 발쯤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입술이 너무 말라 있었던 탓일까, 어딘가가 터져 피가 배는 느낌이 났다.


“못된 실장님.”


굳이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좀 그래 보고 싶었다. 당신 못됐다고, 나쁘다고, 나한테 되게 못되게 군 거 알기나 하냐고 칭얼거리고 싶었다. 그래봤자 받아주지 않을 테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나 아파서 꿈꾸나….”


지훈은 힘없이 웃었다.

우리 집이 어딘지 이 사람이 알 리가 없는데. 아니, 내 이름도 알려준 적 없는데도 알고 있었던 거 같으니까, 집 주소야 어떻게 알아냈을지도 모르지만, 문 열어준 기억도 없는데 어떻게 문을 열고 여기까지 들어온 건지.

정말로, 꿈인가.


“전화 되게 하고 싶었는데.”
“….”
“전화 했는데, 또 막 못된 말 하면.”
“….”
“오늘은 진짜루, 좀 서러울 거 같아 가지구.”


내려다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그 눈을 보니 꿈이 아닌 것도 같았다.


“죽었나 싶어서 와 봤는데, 조잘조잘 떠드는 걸 보니 살만한 모양이네.”


그렇게 아프지만 않았더라도, 손뼉이라도 쳤을 것 같았다. 웬일로, 이 정도일까. 그래도 아프다고 하니까, 조금은 봐줄 마음이라도 생긴 걸까.

어쩌면, 그렇게까지 못된 사람인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간다.”


그런 게, 어딨어요. 문득 그렇게 말해버릴 뻔 했다.

나를 봐 줘요.
안아줘요.
있어줘요. 내 곁에.
오늘만이라도.


“실장님.”


흐려진 발음으로, 지훈은 다니엘을 불렀다.


“저기, 나 아픈데.”


그런데,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하겠지.


“근데.”


퉁명스레 되묻는 목소리가 너무나 예상 범위 안이라, 아픈 것도 잊고 웃음이 났다.


“나 아픈데, 한 번만 안아주면 안돼요?”


이러려고 아픈가보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아무리 뻔뻔한 척 해도, 아무리 괜찮은 척 해도,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니까. 제정신이라면 이런 말을 할 용기 같은 건 애초에 없었을 테니까. 열에 들뜬 척, 아파서 정신없는 척, 이런 말이라도 한 마디 해보려고, 아픈가보다고.


“못되게 말고, 착하게.”


그거면, 지금의 이 통증을 다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쳤냐?”


그러나 다니엘의 대꾸는 싸늘했고, 차가웠다. 각오한 대로. 그 말투는 서운했지만, 일견 안심이 되기도 했다. 자신이 알던 그 다니엘이 맞는 것 같아서. 자기가 꿈을 꾸거나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따위 소리는 아빠한테나 해.”


그는 내뱉듯이 그렇게 말했다.


“자던 잠이나 마저 자. 갈 거니까.”


그렇게 선을 긋고 다니엘은 돌아섰다. 이대로 두면, 그는 또 그렇게 돌아가 거짓말처럼 제 궤도로 돌아가 버릴 터였다. 그렇게 돌아간 그에게, 다시 한 번, 한 번만 안아달라는 응석 같은 것을 부릴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힘이 빠진 지훈의 손은 기어이 돌아서는 다니엘의 재킷 자락 어딘가를 붙잡고 늘어졌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그럴 기회 같은 건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얼마면 돼요?”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온 건, 아마도 다니엘이 평생을 두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던 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싸게 굴지 말고, 좀.”


굵고 곧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얼굴은 분명히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조금은 난처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실은 어쩌면, 매정하게 뿌리치고 돌아가 버리지 못하는 저 태도부터가.

불쑥, 이 사람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남자가, 사랑하는 상대에게, 한 번쯤은 건네 볼 만한 그런 말로.


“손만 잡고 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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