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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q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다니엘이 깨어나기 전, 지훈은 먼저 욕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었는데도, 물이 닿는 곳곳이 따갑고 아프다는 착각이 들었다. 욕실에 있는 바디워시에서는 어젯밤 그의 목덜미에서 나던 것과 비슷한 향이 났다.

가까스로 샤워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지훈은, 욕실로 들어오려던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눈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원래의 그 차갑고 가라앉은 눈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지훈은 슬쩍 몸을 틀어 다니엘의 시선을 피했다.


“자국 예쁘게 났네.”
“….”


지훈은 엉겁결에 손을 들어 제 목덜미에 난 자국을 가렸다. 다니엘은 비웃듯 되물었다.


“한 군데 더 내줄까.”
“….”


그 말이 서글퍼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이미 깨달아버린 감정은 따끔하게 마음을 찔러 왔다. 이젠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의 날카로운 말에, 차가운 눈빛에, 생판 남을 대하듯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말에, 그 손짓에 입게 될 상처는 이제 고스란히 지훈의 몫이었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나갈 준비나 해.”


멍하니 바라보는 지훈에게서 눈을 돌리며 다니엘은 내뱉듯이 말했다.


“여기서 서울까지, 별로 안 가까우니까.”










음악도 라디오도 꺼버린 차 안은 그지없이 조용했다.

초행길이나 다름없는 길이어서, 지훈은 한참이나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수지 둘레를 따라 난 좁은 길을 따라, 군데군데 나무가 서 있고 꽃이 피어 있었다. 어제도 아마 이 길을 따라 여기로 왔던 듯도 했고, 아닌 듯도 했다.

지훈은 흘끗 눈을 돌려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핸들을 붙든 채 묵묵히 전방만 쳐다보고 있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게,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조금은 덜 미울 텐데.

문득, 그에게 무슨 말이든 걸어보고 싶어졌다.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세상 일이라는 건, 뭐든 나 편할 대로만 흘러갈 수는 없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있어야 대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있어야 악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쳐다만 본다고, 얽힌 실타래가 알아서 풀리지는 않을 것을, 지훈은 믿었다. 능숙하든 아니든, 옳은 방법이든 아니든, 먼저 시작하는 사람은 있어야 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수업 없어서요. 그렇게 빨리 안 가도 괜찮아요.”


그런 것 따위, 그는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말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으므로.


“원래는 오늘 1교시도 아니고 0교시 수업이 있었는데요, 폐강 됐어요. 덕분에 시간표는 좀 꼬이긴 했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
“0교시 수업 가려면 여섯 시 전에 일어나야 되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대학생인데, 고등학생도 아니고.”
“….”
“안 그래도 학점도 되게 짠 교수님이어서 이거 어떡하나 했는데, 내심 다행이다 싶었어요. 교수님께는 좀 죄송한 얘기지만요.”


편한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살짝 충혈된 다니엘의 눈매가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딴 거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좀 닥치라는 말이 그의 목구멍까지 올라와 있음을 알 것 같았다.


“저.”


그래도 여기서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 아무 것도 아닌 관계는 여기서 정말로 끝나버릴 수도 있겠기에.


“그린 게이블스 말인데요.”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루 매상이 바닥을 쳐도 밝았던 그 목소리가 전에 없이 침울한 데서, 지훈은 그녀가 자신에게 하려는 이야기의 용건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게, 대학가 건물 모퉁이의 카페 같은 게 버텨내기에는, 그리 녹록한 세상은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인수하려는 거죠.”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에게는, 자신을 봐줘야 할 이유 같은 게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사장님이 오늘 얘기 좀 하자시던데요.”
“….”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 찾아보라고.”


슬슬 짜증스러워지는 것일까. 다니엘은 차창을 열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솔직히요. 저는 실장님이 저 좀 봐주실 줄 알았거든요.”


왜, 드라마 같은 데서 흔히 그렇듯이. 처음에 악연으로 만나서 아웅다웅해도, 결국은 서로를 좋아하게 되는 로맨스 코미디처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워도, 그건 그냥 잠시일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건 역시나 드라마니까 가능한 이야기였던 것일까.


“근데 역시나.”
“….”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거겠죠?”
“이봐.”


다니엘은 눈동자를 흘끗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좀 조용히 가지.”
“….”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명치 앞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꼭 잡아 쥐었다. 음악도 라디오도 없는 중에 지훈마저 입을 다물자,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 가지만요.”


그러나 그 침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지훈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남아서.


“전화, 해도 돼요?”
“전화는, 왜 하려고?”


그러나 대답 대신, 다니엘은 그렇게 물어왔다.


“나한테 전화해서 좋은 말 들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지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전화하려고?”
“….”
“학대당하면 흥분하는 타입이야?”


더럭 얼굴이 붉어졌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낯뜨거운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그지없이 무덤덤해서, 씁쓸했다.


“그런 거면 어제 말을 하지 그랬어. 딱히 그런 취향은 아니지만 맞장구 정도는 쳐 줄 수 있는데.”


딱 한 번, 어젯밤 그 제정신이 아니던 순간 중에, 다리를 들어 다니엘의 허리를 감은 일이 있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너무나 고파서, 목이 말라서 그랬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술을 타고 흐르던 낮고 짙은 신음을 지훈은 기억했다. 그리고 새삼스레 얼굴이 붉어져, 그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척, 고개를 돌렸다.


“웬만하면 하지 마.”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괜히 전화했다가 더러운 소리나 들으면, 그 쪽은 뭐가 좋지?”


그래도, 목소리 듣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그 말은 입 속에서만 맴맴 돌뿐,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다른 수많은 말들이 그러했듯이. 그래도, 조금은 기뻤다. 전화하지 말라는 이유 중에는, 자신이 할지도 모르는 못된 말들을 사서 듣지 말라는 이유도 있는 것 같아서.


“전화 해도 돼요, 실장님은.”


지훈은 조그맣게, 그렇게 덧붙였다.


“언제라도.”










집까지 데려다 줄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어서, 지훈은 눈치껏 길을 살피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가 서는 곳에서 내렸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지훈은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머리 속으로 오늘의 수업 시간표와 아르바이트 가야 할 곳들을 챙겨 보았다. 그린 게이블스에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것도 머리가 아팠다. 당장 그린 게이블스에서 받는 돈만큼이 날아가면 이런저런 공과금을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되도록 빨리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야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버스 정류장은 지훈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길 하나 건너에 있었다. 버스를 내려서던 순간, 허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밤새 시달리고 잠조차 그리 편하게 자지 못한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이런 컨디션으로 오늘 하루를 보낼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아득했다.

지훈은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이마로 조금씩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 머리가 핑 내둘렀다. 지훈은 엘리베이터의 차가운 금속 벽에 이마를 기댔다. 어깨며, 등이며, 온 몸이 푹푹 쑤시기 시작했다. 가벼운 한기가 들었다. 몹시 고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온 몸이 노곤했다.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와, 지훈은 벽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뒷머리를 벽에 기대고, 지훈은 한참을 앓았다. 온 몸이 조이는 것도 같다가, 짓눌리는 것도 같다가, 으깨지는 것도 같다가, 노곤하게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간밤에 다니엘의 입술이, 손 끝이, 몸이 쓸고 지나간 자국 하나하나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앓다가, 지훈은 가까스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든 좀 누워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실장님, 나, 아프려나 봐요.”


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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