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o

-실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절정의 순간은 깊었지만 길지는 않았고, 찰나의 온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제대로 벗지도 못한 옷은 아무렇게나 말려 올라가거나 끌어내려져 지훈의 매무새는 엉망이었다. 그 흐트러진 차림새를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지훈은 그저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소파 등받이 언저리에는 조금 전 절정을 맞았을 때 견디지 못하고 손톱으로 긁어버린 흠집이 적나라하게 나 있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훈은 손끝으로 그 자국을 가만히 문질렀다.

다니엘은 소파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것은 다니엘 쪽도 마찬가지여서, 단추가 서너 개나 풀어헤쳐진 드레스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붙이고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내는 모습은 그에게는 더없이 잘 어울렸다. 그렇게 담배를 몇 모금 빨다가, 그는 지훈의 핸드폰을 한 번 살펴보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지훈은 힘겹게 손을 뻗어 다니엘이 흘끗 보고는 아무렇게나 내던져 놓은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일곱 통. 모두 아빠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러는 사이, 다니엘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별 일 없나.”


그 목소리는, 자신에게 뭔가를 말할 때보다 또 한 음 정도가 내려간 낮고 짙은 음색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그에게서 들은 적이 없었던 다소 거친 사투리도.

그러나 지훈의 귀에 들어와 박힌 것은 비단 그 음색과 사투리만이 아니었다. 그 ‘말투’였다. 다니엘은 물론 자신에게도 꽤나 거침없는 반말을 했지만, 조금 전의 그 말투는 자신에게 말을 건넬 때의 그 날선 느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뚜렷한 간극은, 어쩐지 서운했다.


“안다.”


한참이나 상대의 말을 듣고만 있던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여 같이 있다.”


나에 대한 이야길까. 지훈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나에 대한 이야기까지 저렇게 스스럼없이 다 하고 있는 것일까.


“내는 됐고. 알아서 갈 거니까.”


흘끗, 뒤를 돌아보는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여전히 무심했고, 읽을 수 없었다.


“여기는 나중에 집에 좀 데려다 주믄, 고맙겠고.”


그 말은 어쩐지 섭섭했다. 여기까지나 끌고 와 놓고, 함께 돌아가 주지도 않겠다는 걸까. 어차피 같은 길일 텐데.


“양평.”


아마도 상대가 어디 계시냐고 묻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끝으로,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지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 앉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적당히 가다듬고 웅크려 앉은 지훈에게로, 다니엘의 시선이 천천히 돌려졌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예요?”


물어봐야 대답할 리가 없는데도, 그냥 그렇게 물어보고 말았다. 누군지 궁금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당신한테도 그렇게 살가운 사람이 있긴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역시나 그러리라고 생각했지만, 다니엘은 그걸 네가 왜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한동안 지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비서.”


그 대답은 참 쉽고 간단해서 맥이 풀렸다. 비서라면, 혹시 사무실에 갔을 때 봤던 그 여직원을 말하는 걸까. 그러나 방금 다니엘의 말투로 봐서 상대가 그녀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문득, 지훈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전화번호 하나가 있었다.


“혹시, 그 때 전화번호.”
“맞아.”


호텔에서 다니엘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때 핸드폰에 전화번호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가, 신호가 한 번 채 제대로 울리기 전에 끊었던 기억도 났다. 그 번호의 주인일까.


“비서면, 회사 사람이에요?”
“그런데.”
“근데 되게 친한가 봐요.”


문득, 호텔로 불려갈 때 그린 게이블스와 편의점에 미리 전화를 해서 대타를 보내겠다는 말을 했다는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던 남자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났다. 그러나 지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이 그랬을 리는 없었다. 미워하니까.


“사투리 써서요.”


그게 뭐 어땠다는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지훈의 어머니 또한 고향이 마산이어서, 친구들이나 외가 쪽 친척들과 통화를 할 때는 그리 심하지는 않으나마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다니엘의 목소리는, 서울말보다 사투리에 조금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러나 다니엘은 더없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내가 편한 사람 앞에서 사투리를 쓰나 안 쓰나 하는 게, 박지훈 씨한테 무슨 의미라도 있나? 어차피 박지훈 씨한테 쓰는 것도 아닌데.”


그 사이, 조금 전의 그 사투리는 거짓말처럼 날아가 버린 말끔한 말투로, 그는 지훈에게 말을 건네 왔다. 그 급작스럽기까지 한 변화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비서 분.”


지훈은 가만히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여자예요?”
“아니.”


사실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묻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분, 좋아해요?”
“좋아하지.”


그 대답은 너무도 쉽고, 단호하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서 서운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믿는 사람이니까.”
“혹시요.”


지훈은 불쑥 물었다.


“그 비서 분이랑도, 잤어요?”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뱉아놓고, 지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게 왜 궁금한 건지, 그건 지훈 자신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지금껏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투로 말을 거는 것을 듣는 순간, 뭔가가 자신의 가슴 속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깨져나가는 것을 지훈은 분명히 들었다. 알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내게는 그렇게나 차가운 당신이, 그렇게나 격의 없이 대하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냐고.


“그딴 게, 왜 궁금해?”
“그냥요.”


지훈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아까 그랬잖아요.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자는 거 아니라고. 엄청 싫어하는 사람이랑도 잘 수 있는 거라고.”


나를 미워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그랬으면 했다. 누군가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내게도 다정했으면 했다. 그게 그렇게나 큰 욕심이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다.


“그럼 실장님은.”
“….”
“싫어하는 나하고는 자고.”
“….”
“믿고 좋아하는 그 분하고는, 자지 않는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싫어하는 사람과, 왜 섹스 같은 걸 하는 건지. 몸이 부대끼고, 숨결이 섞이고, 서로 심장박동의 속도가 비슷해져 가는 그런 걸, 왜 싫어하는 사람이랑 같이 하는 건지.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내가 당신보다 한참 어리기 때문인가요.


“난 좀 있다가 갈 거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약간은 핀트가 빗나가 있었다.


“그 친구가 박지훈 씨를 데려다 주러 올 텐데, 그 때 만나 봐. 내가 같이 잘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 때 판단해.”


그는 아무래도, 정말로 지훈을 서울까지 데려다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긴 했지만.


“서울 가는 거 아니에요?”
“맞는데.”
“그런 거면, 실장님 갈 때 같이 가도 되잖아요.”
“내가 싫은데.”


어림없다는 듯, 비웃듯 대답하는 음성은 말 한 마디 붙여볼 여지조차도 없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싫은 사람에게 어차피 가는 길 차를 태워주는 걸 택하지 섹스 같은 걸 하지는 않을 거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조금 전 그 순간들. 처음이었고, 익숙하지 않아 아팠고, 힘들었다. 자신의 몸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 ,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지금 이 순간도 들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다니엘에게도 이런 기분이 들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이런 낯선 기분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그는 나와 잔 것일까.

그 사실에 대한 해답을, 지훈은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박지훈 씨 애인.도 아니고, 집에 데려다 주기까지 해야 되나?”


‘애인’이라는 그 말에는 필요 이상의 방점이 찍혔다.


“데리러 오라고 할 만한 사람 있어? 그럼 그 사람한테 전화하든지.”


다니엘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까 그, ‘아빠’라든가.”
“….”


고개를 숙인 지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돼요, 그건.”
“왜?”


아빠와 나는, 실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내가 아빠에게 일방적으로 폐를 끼치고 있을 뿐이니까요.
제 자식도 아닌 녀석의 첫 경험 같은 걸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
“박지훈 씨 성인이잖아. 다 큰 어른이, 밖에 나가서 누구랑 섹스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안 돼요.”


묵묵히 고개를 젓는 그 얼굴에는 고집 비슷한 것마저 어려 있었다.


“자세한 얘기 하긴 좀 그런데요, 저는 아빠한테 굉장히 신세를 많이 졌구요.”


누가 뭐래도 지훈에게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법이었다. 그 거리를 지키지 못해, 아빠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첫 경험 이야기 같은 건, 친아버지에게나 할 수 있는 얘기였다. 그저 좋은 사람이기만 한 ‘아빠’가 아니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요.”
“아, 그래?”


다니엘은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집어던졌다.


“여기까지나 왔는데, 한 번은 좀 아쉽지?”
“네?”


지훈의 얼굴이 놀라움에 굳어지는 걸 보면서도, 다니엘은 봐주지 않고 지훈의 손목을 끌어당겨 일으켜 세웠다.


“이번엔 방에 가서 할까. 소파 말고.”


순간 더럭, 지훈은 겁에 질렸다. 조금 전의 그 광폭하기까지 한 감정의 흔들림이 다시금 머리 속을 치받아 와, 멀미 비슷한 울렁거림이 일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고 버티었다. 무서웠다. 다니엘이 아니라, 그 알 수 없는 휘둘림이.


“저기, 도대체 왜.”


내가 싫다면서, 나랑 자려는 건데요.

그러나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