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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e

-말을 하면 우스워지고, 말을 안 하면 호구가 되는.











밥을 차려먹는다는 건, 꼭 필요한 일인 동시에 때로는 더없이 귀찮기도 한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 이렇게 좋은 세상에 한 알만 먹으면 밥 대신 되는 알약같은 건 없나 하는 멍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바깥에서 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 보니 며칠 전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던 아빠였다. 그 손에는 금방 포장한 피자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얼마 전 아파트 단지 안에 생긴 화덕 피자집 마르게리타 피자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훈은 이 집 피자를 그리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빠는 지훈이 그 집의 마르게리타 피자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훈은 그의 그런 착각을 딱히 일부러 깨뜨릴 마음은 없었다.

피자 박스를 펼치고 그 속에 든 소스 몇 가지를 풀어서 벌려 놓았다. 금방 구워 잘 떼어지지 않는 피자 위로 칼집을 몇 번 더 내고, 지훈은 제일 큰 조각을 덜어 아빠 몫의 앞접시에 얹었다. 그리고 제 몫의 피자도 한 조각 떼어냈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운운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금방 구운 화덕 피자는 맛있었다. 귀찮게 밥을 차려먹지 않아도 되어서 더욱 그랬다.


“저번엔.”


한 입 가득, 치즈가 올려진 피자를 우물거리며 지훈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순간 아빠의 표정이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굳어지는 걸 지훈은 분명히 목격했다. 물론 그 표정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 아차 하는 사이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아무 말도 없이 가셔서.”


아빠가 전화 한 통에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돌아가 버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더라도, 왜 그랬는지를 묻지 않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 불문율을 깨뜨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궁금했다. 아빠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실이.


“아, 그게.”


티슈 한 장을 뽑아 손에 묻은 기름기를 닦으며, 아빠는 대답했다.


“깜빡 하고 있었는데, 제사가 있는 날이었어.”
“제사요?”


지훈은 움찔 놀라 아빠를 돌아보았다.


“중요한 날이셨네요.”
“중요한 날은 무슨.”


그러나 아빠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실은 신랄하기까지 했다.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어쨌든 가족이었다는 거잖아요.”
“가족도 아니야.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이었으니까.”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의 제사에 어째서 그렇게 끌려가듯 불려간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지만, 어째서인지 거기까지 물어보면 정말로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크든 작든 건드려지면 아픈 가시가 있다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지점이야말로 아빠의 아픈 지점일 거라는 것을, 지훈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주 지독한 악연이었지.”


아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책임도 아닌 일을 내 책임이라고 떠밀어 놓고, 일평생 나를 속인 아주 뻔뻔한 인간이었어.”
“….”
“게다가 더 나쁜 건.”


아빠는 박스 안에 남아 있는 다른 조각을 덜어 앞접시 위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 인간이 날 속이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는 거고.”
“왜요?”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지.”


아빠는 씁쓸하게 웃었다.


“말을 하면 우스워지고, 말을 안 하면 호구가 되는, 그런 순간이.”
“….”
“우스워지는 것보다는, 호구가 되는 편이 조금은 낫겠더라. 그래서.”


괜한 말을 꺼냈나 보다, 하는 후회가 지훈에게로 밀려들었다. 지훈은 먹다 만 피자 한 조각을 든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가족이라는 것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마냥 그렇게 따뜻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지훈도 알았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랬다. 아빠와 그의 가족이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본인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게 아닐까 하고.


“됐다.”


아빠는 언짢은 듯 혀를 차고는, 웃었다.


“어쨌든 죽은 사람이니, 뭐.”


하긴 그렇다. 그 사람이 아빠에게 무슨 잘못을 했든, 그는 이미 죽었기에 제사를 지내는 것일 터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쨌든 그 일은 아빠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살아서 버티는 것이, 결국 이기는 거니까.


“그래도 머리카락 한 올만큼 양심은 있었던지, 자살했지.”
“….”


푸른 수염의 마지막 방문을 열었던 아내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순간 뒤통수가 뜨끔해져, 지훈은 입 속에 든 피자의 고소한 맛을 잊었다.


“뭐 다 끝난 이야기니까.”


지훈의 불편해 하는 낌새를 눈치 챈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이 이야기는 너에게나 나에게나 피차 편하지 않은 주제이니 웬만하면 다시는 꺼내지 말라는 의미로 들렸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피자 드세요.”


지훈은 웃으며 기름기 묻은 손끝을 닦고는 유리잔에 콜라를 따랐다.


“다 식겠어요.”










아빠는 가끔 지훈의 집에서 자고 갈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지훈은 집에 하나 뿐인 침대를 양보했지만 그는 안 그래도 공부하느라 알바하느라 바쁜 사람이 편한 데서 자야 한다며 한사로 거실 소파에서 잤다. 오늘도 그러려나 생각했지만 아빠는 오늘은 지훈의 집에서 자고 가지 않았다.

피자를 다 먹고 늦은 시간 하는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반쯤 보다가, 아빠는 쉬는 거 방해 그만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은 그런 아빠를 현관문까지 배웅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지훈은 미처 치우지 못한 피자박스를 접어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내일 아침 나갈 때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콜라가 한 잔 조금 안 되게 남아 있어서, 지훈은 그 콜라를 컵에 따라 홀짝 마셨다.

너는, 엄마를 참 많이 닮았구나.

콧잔등을 미끄러지는 안경이 거슬려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매만지는 지훈을 바라보다가,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나마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엄마를 닮았다는 건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어머니와 함께 간 거의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에게서 듣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에요? 엄마를 아주 빼다 박았네. 눈 크고 예쁜 것 봐.

그러나 그 말을, 아빠의 입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빠와 어머니가 어떤 사이였는지, 지훈은 정확히는 몰랐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빠의 말처럼 단순한 친구는 아닐 것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런 거라면, 예전에 사랑하던 사이였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빠가 자신에게 베푸는 이 모든 것은 하나도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빠에게도, 자식이 있지 않을까.

문득, 아빠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일까가 궁금해졌다. 물론 그럴 거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쓰는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빠는 거의 매 순간 지훈에게 살가웠고, 다정했다. 저런 사람이 좋은 아버지가 아닐 리가 없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아빠의 말에서 순간순간 느껴지는, 아마도 가족과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닐 것 같다는 예감과는 별개로.

하지만, 그럼 나는.

집에 진짜 자식을 두고도 밖에 나가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 건, 아버지로서 옳은 일일까.

아주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뻐꾸기와 오목눈이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뻐꾸기는 오목눈이의 알 하나를 없애버리고 거기에 제 알을 낳아놓고는 사라진다. 그 알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도저히 같은 종류의 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랗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오목눈이는 제 새끼도 아닌 그 알을 똑같이 품어 기르고, 그 알이 깨어 태어난 뻐꾸기 새끼가 저보다 훨씬 더 덩치가 커져도 사력을 다해 먹이를 물어나르며 새끼를 키운다. 그 뻐꾸기 새끼가 알에서 깨자마자 본능적으로 다른 알들을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내 깨뜨려 버린 것도 모르고.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무섭고 서러워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울었다. 도대체 왜 저런 거냐고, 왜 저러는 거냐고, 저래도 되는 거냐는 말만 반복하면서.

문득, 그 다큐멘터리 생각이 났다.

아빠는, 아빠의 자식들에게 나에게만큼 살가울까. 다정할까. 따뜻할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아빠의 진짜 자식들에게 자신은 아주 나쁜 사람일 테니까. 진짜 오목눈이의 알들을 다 깨뜨려버리고 먹이를 빼앗아먹는 뻐꾸기 새끼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단 한 순간도, 자신은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으니까.


“설마.”


지훈은 입을 열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빠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그건 너무 괴로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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