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b

-차가운 눈이었다.











지훈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카페, ‘그린 게이블스’는 지훈이 다니는 서문대학교 정문 앞, 한 건물의 모퉁이 한 편에 있었다.

그린 게이블스의 사장은 40대 초반의 독신 여성이었다. 몇 년 전까지는 남들은 못 들어가서 안달을 하는 어느 대기업에서 과장인지 차장인지까지 올라갔었으나, 이렇게 살다가는 제 명에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싹싹 긁어모아 이 카페를 차렸다고 했다. 대기업에서 오래 일했다는 사람 치고 그녀의 그런 결정은 다분히 즉흥적이고 낙천적인 것이라, 그녀는 특별한 비전도 계획도 없이 그저 ‘적당히 속편하게 일하고 먹고 살 만큼은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카페를 차렸다고 했다. 그녀는 커피를 좋아했지만 전문가라 할 정도의 식견을 가진 정도는 아니었고, 자연히 그린 게이블스의 커피는 어디서나 사 먹을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지극히 평범한 커피였다.

그리고 지훈은 이 카페의 유일한 아르바이트 직원이었다.

지훈은 매일 오후 다섯 시에서 아홉 시까지 이 카페에서 일했다. 파리를 날린다고까지 할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어서, 지훈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게 안에서 혼자 보냈다. 매상이 별로인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이 근방에 고만고만한 카페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이 건물에서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는 몇 발 안 되는 거리 안에도 지훈이 기억하는 카페만 다섯 군데가 있었고 그 중 두 군데는 대기업에서 하는 프렌차이즈 카페였다. 게다가 매장이 좁아 탁자가 서너 개 뿐이고, 그러다 오니 오래 앉아있기가 눈치 보이는 그린 게이블스는, 주된 고객층인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딱히 찾아올 만한 장점이 있는 카페는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에, 지훈은 짬짬이 틈을 내어 그림을 그렸다. 거창한 것들은 아니었다. 때로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걷는 모습을 크로키하기도 했고, 컵이나 쟁반, 시럽 병 같은 것들을 데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좋은 공부였다. 사장은 그런 걸 다 알면서도, 손님 없을 때 하는 건 상관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날도,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가뜩이나 손님이 없는 중에, 오늘은 조금 더 그런 것 같았다. 지훈은 매대 아래로 허리를 숙이고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는 몇 번 졸린 눈을 끔뻑이다가 길게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미처 씻지 못한 컵 몇 개를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딸랑, 하는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컨디션도 좋지 않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졸음이 연거푸 쏟아지던 참이어서, 뒤에서 드는 인기척이 반가웠다. 지훈은 에이프런에 손을 닦고, 몸을 돌렸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은 매대 뒤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이마부터 보게 되는 건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그랬다. 이마와 그 아래 자리한 눈썹, 눈까지가 반듯하고, 남자답게 생긴 사람이었다. 염색기 하나 없는 새까만 머리칼을 가지런하게 뒤로 넘긴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버릇인지, 아니면 원래 사람을 그렇게 쏘는 듯이 쳐다보는 사람인지, 그는 유독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뚫어져라 지훈을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서 일부러 찾아온 것처럼.

그 쳐다보는 시선에 질려, 지훈은 잠시 제가 주문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저기, 손님?”


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문을….”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 음성은 나직하고, 탁했다. 그리고 듣기에 따라서는 꽤 매력적이기도 했다.


“테이크 아웃으로 드릴까요? 아니면….”
“마시고 갈 겁니다.”


그는 이 근방에서 보기는 쉽지 않은 격식을 갖춘 정장 차림이었다. 아마도 학생은 아닌 것 같았고, 딱히 교직원 쪽도 아닌 것 같았다. 근처에 들르러 온 직장인일까. 넓은 어깨에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좁은 수트의 깃은 기묘할 정도로 관능적이었다.


“혹시 통신사 카드나….”
“없어요. 그딴 거.”


그 목소리에는 희미하나마 짜증이 배어 있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움찔, 고개를 움츠렸다. 카페에 오는 손님들 중에는 더러, 포인트니 할인이니 하는 것을 귀찮고 번거롭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지금의 이 사람 또한 그런 부류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오늘 하루 되는 일이 지독하게 없는 와중이라 어설픈 참견이 귀찮았을 뿐인지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카드를 긁고, 카드와 영수증, 그리고 진동벨을 챙겨 내밀었다. 그는 카드를 대충 지갑에 쑤셔 넣고 진동벨만을 들고 제일 안쪽의 구석진 테이블로 들어갔다. 지훈은 매대 위에 남겨진 영수증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따로 챙겨 에이프런 주머니에 넣었다.

분쇄한 원두를 템퍼링해 에스프레소를 뽑고, 물에 희석한 후에, 얼음을 담은 컵에 붓는 간단하다면 간단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오늘 따라 원두를 떠 넣는 양을 조절하는 것부터 뭐가 마음대로 잘 되지 않기 시작하더니, 끝까지 자잘한 실수가 이어져 보통 때 1, 2분이면 한 잔이 나오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는 데 대략 5분 정도가 걸렸다. 그것도 모자라 식지도 않은 커피 머신에 손끝을 델 뻔하기도 했다.

목이 긴 유리잔에 커피를 담고, 얼음을 담고, 검정색 스트로를 구부려 꽂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동벨을 내려놓고 커피가 든 잔을 집어갔다. 쟁반도, 컵 밑에 받혀놓았던 코스타도 그 자리에 놓아둔 채였다. 워낙에 좁은 매장이라 음료를 마시고 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아도, 개중에도 가끔 그런 식으로 쟁반이며 코스타를 두고 컵만 들고 가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묘하게 서운한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신경이 쓰여 지훈은 다른 일을 하는 내내 구석자리에 앉은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기껏 커피를 가져가 놓고도, 그는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한참이나 턱을 괴고 그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 모습은, 보기에 따라서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 혼자 뭔가를 생각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이, 아마도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대생 몇 명이 커피를 사러 왔다.

언제나처럼 지훈은 모든 손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그들의 주문을 받았다. 가끔 메뉴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달달한 것을 좋아하신다면 캐러멜 마키아토를,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신다면 카페라떼를, 적당한 달콤함과 적당한 부드러움을 원하신다면 바닐라 라떼를, 하는 식으로 간단한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문하는 음료는, 좀체로 아까 같은 실수 없이 길면 2분 짧으면 1분 남짓 만에 슬리브를 끼운 테이크 아웃 컵에 담겨 곱게 손님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우르르 밀려든 몇몇 사람들이 제각각 음료를 사 들고 카페를 떠나 버리자, 가게 안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렇게, 이무렵의 피크 타임은 끝났다.

지훈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문득, 아까 그 남자가 아직도 가게 안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매장이 그다지 그다지 넓지 않아, 카운터에서도 그의 커피가 거의 줄어들지 않은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지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운터 옆에 꽂혀 있는 잡지 한 권을 뽑아들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탁자 위에 살짝 그 잡지를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쳐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유 없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도, 지훈은 움찔 놀랐다.

차가운 눈이었다.


“아.”


지훈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행 분이 늦으시거나, 한 거 같아보여서.”
“…,”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도, 이런 건 됐다는 말조차도.

그 대신 그는 의자를 밀어내고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말로라도 작다거나 왜소하다고는 할 수 없는 체격이었지만, 그의 움직임에는 느긋한 민첩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거의 입도 대지 않은 듯한 커피잔을 집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픽업 매대 위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입구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요컨대, 그는 더 이상 이 공간 안에 있을 이유를 상실한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지훈은 그를 불렀다.


“영수증 챙겨 가세요.”


실은, 핑계였다. 무엇을 위한 핑계인지, 그것은 지훈도 몰랐다. 지훈의 손은 에이프런 주머니 속에서 영수증을 끄집어 내 그에게 내밀었다.


“버리세요.”


그러나 그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 눈빛만큼이나.


“이거 있어야 주차 할인되거든요.”
“….”


굵은 눈썹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마지못해 지훈이 내미는 영수증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지훈은 반으로 접은 영수증 사이에 정말로 그에게 주고 싶었던 다른 무언가를 끼워 건네는 것에 성공했다. 얇은 영수증 사이에 무언가 다른게 끼어 있는 감을 느꼈던지, 그는 반으로 접힌 영수증을 젖히고 그 속에 든 것을 쳐다보았다.


“저희 가게 스탬프 카드예요.”


지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열 번 찍으면 음료 한 잔 무료예요.”
“….”


그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자신처럼, 매우 얇고 맵시가 날렵한 지갑을 벌려 그 속에 영수증과 스탬프 카드를 아무렇게나 집어넣었을 뿐이었다. 지갑을 벌리고 그 속에 스탬프 카드를 집어넣는 긴 손끝의 움직임을, 지훈은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순간 지훈은 예감했다. 아마도 그는, 다시는 이 가게에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4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