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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a

-이 정도 좋은 일쯤은 있어도 되는 거라고.











왜 친구랑 싸웠어? 그런 말이 어딨어. 싸우는 것도, 화해하는 것도, 혼자서는 못하는 거야. 친구도 잘못을 했겠지만, 지훈이도 뭔가 잘못을 했으니까 싸운 거겠지. 아니야?

전에, 손가락 끝에 가시 박혔던 적 있지? 지훈이가, 손가락 끝에 가시가 박혀서 아픈데, 친구들이 와서 흙장난 하자, 공놀이 하자 하고 조르면 짜증이 나겠지?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소리도 빽 지르게 되고, 짜증도 확 내게 되고, 그런 거겠지? 그래, 안 그래?

사람은 있지, 누구에게나 마음에 박힌 가시가 있는 거야, 지훈아. 그게 크고 아픈 사람도 있고, 작고 덜 아픈 사람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다 건드려지면 아픈 데가 있어. 이유 없이 못된 말 하고, 못되게 구는 친구가 있으면, 그건 그 친구가 그런 데가 건드려져서 그러는 거니까, 용서해 줘야 돼.

알았지?










몇 만원 더 주고, 조금 더 큰 냉장고를 살 걸 그랬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사람이란 정말로 적응의 동물인 모양이었다. 고시원에서 지낸 나날은 꽉 채워 넉 달이 조금 덜 됐던지, 조금 더 됐던지, 하는 정도였던 것 같은데, 최대한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생활방식이 그 사이 몸에 배어 버렸다. 냉장고를 살 때만 해도 그랬다. 냉장고가 커 봐야, 쓸데없는 것들이나 사다 날라서 꾸역꾸역 욕심껏 넣어놓았다가, 결국은 유통기한이 지나 고스란히 음식물 쓰레기로나 되게 마련이라고, 그러니 혼자 빠듯하게 쓸 정도로 작은 냉장고를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냥 몇 만원 더 주고 조금 큰 걸 사라는 재활용센터 사장님의 말을 사양하고 굳이 작은 것을 사 왔다. 그랬더니 먹다 남은 국이나 찌개조차 냄비 채 넣어놓을 공간이 나지 않아, 밥 한 끼 차려먹고 나면 한참을 냉장고 앞에 퍼지고 앉아 반찬통들을 가지고 테트리스를 해야 했다. 그것도 뭐, 나름의 소소한 재미였지만.


“그러지 말고.”


그 모양을 뒤에서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냉장고를 하나 사는 게.”
“냉장고를 왜 사요. 이거 새 건데.”


물론 그 앞에는 ‘거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저희 교수님이 그러는데요, 다이어트를 하려면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밥그릇을 바꾸는 거래요.”
“그게 무슨.”
“냉장고 크면 괜히 먹지도 않을 거 막 사다 나르게 되구, 그거 다 상해서 버려요.”


아빠는 늘 그랬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몇 달, 도대체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느라 흘러가는 물 위에 뜬 나뭇잎처럼 흘러가던 중에, 그야말로 신데렐라에게 나타난 요정 할머니처럼 나타난 그는, 별로 어렵지도 않게 지훈에게 닥친 많은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집이었다. 그는 지훈에게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한참을 설명했지만, 그 말들 중 대부분은 지훈으로서는 알아듣기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다만 그가 이해한 것은 아빠의 친구 중에는 돈이 너무 많아서 집을 수십 채나 사 놓고 세를 놓아 한 달에만 월세로 몇 억을 버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세를 놓은 집 중에 갑자기 외국으로 발령이 나서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도 못했는데 비어버린 집이 한 채 있다는 것 정도였다.

집이라는 게, 참 그렇지. 사는 사람이 있는 거랑 없는 거랑 천지 차이야. 계약 기간이 1년도 넘게 남았는데 1년 넘게 비워 놓으면 다음 세입자를 받을 때 여러 가지로 피곤해 지니까, 네가 그 집에 살면서 집 관리도 좀 하고 하지 않을래?

지훈으로서야, 로또 1등에 맞는 것보다도 솔깃한 제의였다.

그런데 그럼, 월세는 어떡해요?
월세를 왜 내? 집 주인이 너한테 되레 월급을 줘야지.

집이라는 건, 살게 해 달라고 집주인에게 매달려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지훈에게 ‘살아준다’는 말은 그만큼 생경하고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뭐가 어찌 된 건지도 모르게, 지훈은 며칠 후 강남 한 복판의 작은 아파트에 거의 없다시피 한 짐 몇 가지를 들고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 후로도 그는 끊임없이 지훈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 했다. 어느 날은 침대를, 어느 날은 책상을, 어느 날은 컴퓨터를 사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그 말들을 사양했다.

저는 여기 사는 것만 가지고도 아빠랑 아빠 친구한테 너무 신세를 많이 지는 걸요. 그 안에 들어갈 건 제가 알아서 해야죠.

그것은, 그의 마지막 양심 같은 것이었다. 내게 왜 이렇게 잘해주느냐고, 한번은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아빠는 지훈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으며, 너는 착한 녀석이니까, 하고 대답했었다. 세상엔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 일이,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은 일어난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이 정도 좋은 일쯤은 있어도 되는 거라고.


“커피 드실래요?”
“커피 좋지.”


지훈은 싱크대 정리장 안에서 커피 믹스 두 개를 꺼냈다. 얼마전 학교 축제 때 만들어서 팔았다가 남아서 집으로 가져온 머그컵에 믹스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뜨거운 커피를 사이에 놓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어, 좋다.”


지훈은 피식 웃으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좋긴 뭐가 좋아요. 믹슨데. 텁텁하고.”
“네가 뭘 몰라서 그렇지, 커피는 원래 믹스 커피가 제 맛인 거다. 쓰기만 한 원두커피 같은 거는, 난 그거 도대체 무슨 맛에들 먹는지.”


아무리 들어도 저 낯 뜨겁지 말라고 하는 말인 것 같은 그 말을 들으며, 지훈은 말없이 커피 한 모금을 넘겼다.

지훈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기억이 남아 있는 끝의 끝까지를 더듬어가도,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를 보살피고 키운 것은 오로지 어머니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그랬던 어머니는, 지훈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췌장암 4기 판정을 받고 몇 달을 투병하던 끝에 사망했다. 그리고, 마치 바톤 터치라도 하듯, 나는 네 엄마의 오래된 친구이고, 그냥 아빠라고 부르라던 이 남자가 지훈의 눈 앞에 나타났다.

어쩌면, 진짜 아빠인 게 아닐까.

그런 의심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는 지훈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나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그러나 어느 날 큰맘을 먹고 얼굴까지 붉혀가며 한 그 질문에, 그는 한참을 웃더니 그런 거 아니라고 대답했다.

네가, 내 아들이면 얼마나 좋겠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던 그 말은,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봐도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을 것 같은 나이인데, 그는 이상하리만큼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거나, 떨어져 살고 있거나, 기타 등등의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고 혼자 짐작해 볼 뿐이었다.


“저녁이 매일 이렇게 늦니?”
“아니요. 오늘은 알바가 늦게 끝나서.”
“그래도 밥은 시간 맞춰서 먹어버릇 해야 몸이 안 상하는데.”
“저 이제 스물한 살밖에 안 됐어요. 벌써 몸 걱정 할 나이는 아닌데.”
“젊은 거 믿고 막 달리지 마라, 그거 다 늙어서 배로 게워낸다.”


아빠가 정확히 몇 살인지, 지훈은 그것도 몰랐다. 언뜻 보기로는 50대 초반,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이에 비해 군살이 별로 없는 체격에 스타일이 좋은 사람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지만 지훈의 앞에서는 피우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가끔, 자신에게 이 집을 내 준 인심 좋은 집주인은 아빠의 친구가 아니라 아빠 자신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은 모두가 비싼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지훈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도 몇 가지나 있었다.

적막한 거실 안에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의 것이었다. 그는 핸드폰 액정을 한 번 들여다보더니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리고는 액정이 보이지 않도록 핸드폰을 바닥에 엎어 놓았다.


“안 받으세요?”
“응, 괜찮아.”


그는 지훈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핸드폰은 그치지 않고 계속 울렸다. 누군가가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고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굳이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끊이지 않고 계속 울리는 벨 소리에 지훈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 쪽으로 끌려갔다.


“아, 새끼 진짜.”


그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짜증스레 혀를 찼다.


“지훈아, 아빠 전화 좀 하고 올게.”
“그냥 여기서 하세요. 어차피 저는 들어도 무슨 얘긴지도 모르는데요.”
“별로 네 앞에서 할 만한 이야기 아니라 그런다.”


그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지훈은 그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뭐 어떤 걸까.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저 편이 나에 대해 들어서는 안된다는 뜻일까.

지훈은 한 모금 남은 커피를 홀짝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쩍 들여다 본 아빠의 머그잔 안에는 마시다 만 커피가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그날 아빠는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전화 좀 하고 오겠다고 나갔다가 그 길로 돌아가 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마도 회사에 뭔가 바쁜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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