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W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보겠다며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까지는 푹 쉬시고, 내일은 출근하세요. 출근해서 일도 하고, 퇴근하고 그 친구 만나러 가세요. 전화 같은 거 하지 말고, 얼굴 보고 얘기하세요. 그게 뭐든 간에. 그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다소 건방지기도 했지만, 꼭 그만큼이나 오직 우진만이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우진이 돌아간 후, 다니엘은 술이 조금 남은 술병과 술잔을 치우고 거실 안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요 며칠간 들은 이야기들은, 사실 아직도 한 마디 한 마디가 벅찼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버거운 사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들어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방금 우진에게서 들은 이야기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버릇처럼 담배갑을 더듬어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다니엘은 베란다로 나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완연히 밤이 찾아온 도시는 오가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번잡할 뿐 그래도 많이 조용해져 있었다.

방금 마신 술 때문일까, 홧홧하게 속이 타는 느낌이 났다. 그 때 아닌 갈증은 물을 마셔도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다니엘은 며칠 만에, 옷을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갔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방금 전 적지 않은 술을 마신 터라 운전도 무리였다. 그냥 무작정, 핸드폰과 지갑만 집어 들고 쫓기듯,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이런 기억은, 요 며칠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를 통틀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집을 나와, 다니엘은 발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저녁이라기엔 늦고, 새벽이라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거리에는 적지 않은 인적이 있었다. 이제야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늦은 시간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도, 새벽 시간의 호젓한 러닝을 즐기려는 사람도 있었다.

늘 차만 타고 다니느라 몰랐던 길이었다. 그의 아파트 근처에는 들어가서 앉을 자리조차 없어서 아마도 포장만 해 갈 수 있지 않겠나 싶은 작은 마카롱 가게가 있었고, 제법 유명한 바리스타가 낸 로스터리 카페의 체인점이 있었고, 24시간 영업을 하는 해장국집이 있었다. 그 외에도 맞춤셔츠 전문점이 한 군데, 코인 세탁소가 두 군데, 디지털 사진 전문 스튜디오가 한 군데 있었다. 이 아파트에 이사 온 것이 2년도 넘었지만, 집 근처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그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곳에서도, 모르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별로 운동부족이라는 생각은 스스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체력과 몸을 관리하는 것도 다니엘이 해야 할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으므로, 그는 요즘도 시간을 내어 일주일에 두 세 번은 피트니스에 들러 운동을 했다. 그러나 그런 운동에 사용되는 근육과 걷거나 뛰거나 물건을 나른다거나 하는 실제적인 일에 사용되는 근육은 조금 계통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느긋하게 종아리가 당겼다.

저만치 길가에, 환하게 불을 켠 편의점이 보였다. 문득, 그 언젠가 지훈이 일하고 있는 편의점으로 늦은 새벽 시간 일부러 찾아갔던 기억이 났다. 그 날이었던가, 처음 키스를 했던 날이. 그 날의 기억은, 억지로 밀어붙인 자신에게조차도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니었다. 지훈은 그날의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다니엘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샀다.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르바이트 직원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가 고른 물건들을 계산하고, 영수증을 내밀었다. 카운터 매대 위에는 어떤 종류의 수험 문제집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다.


“공부해요?”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었다. 이런 곳에 와서, 일하는 사람과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그것은 특별한 선민의식이나 특권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에 가까웠다.


“네? 아, 네.”


그는 슬그머니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매대 위에 펼쳐진 문제집을 덮어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으로 밀어놓았다.


“취업 준비중이라서요.”
“힘들겠네요. 일하면서 공부하려면.”


그러게, 다니엘도 한 명 알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중간 중간 짬을 내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그리고 그는 그런 사정을 말하려는 사람에게, 일하러 나와서 틈틈이 딴 짓이나 하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려는 수작이라고 몰아붙였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다. 새삼 가슴이 미어졌다.


“아, 저기.”


그런 다니엘의 소회 따위 알 리 없는 직원은 가게 뒤편의 냉장고를 가리켜 보였다.


“이 커피 원 플러스 원인데요.”
“난 굳이 두 병까진 필요 없는데.”
“근데 제품이 그렇게 기획된 거라서, 이거 수량 안 맞으면 그것도 안 되거든요.”
“….”


다니엘은 잠자코 냉장고로 가서 자신이 고른 것과 같은 커피를 한 병 더 집어왔다. 그리고 그 커피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늦게까지 고생하는데 내가 뭐 해줄 건 없고.”
“….”


서름한 말을 하려는 입술은 더디게 열렸다.


“일 열심히 해요. 공부도.”
“네… 감사합니다!”


별 것도 아닌 커피 한 병에 꾸벅, 깊숙이 숙여지는 정수리를 바라보는 마음은 복잡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 거였다.
이렇게도.










편의점 바깥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잠시 굳어진 다리를 쉬고, 다니엘은 다시 일어섰다.

서울은 생각보다 좁은 도시라고, 그는 늘 생각했다. 그리 넓지 않은 면적 안에 뭔가가 너무 빽빽하게, 꽉 들어차 있을 뿐 그 넓이 자체가 그리 넓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랬다. 집에서 나온 지 한 시간 남짓 만에, 다니엘은 벌써 행정구역상 자신의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다른 곳까지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만치, 십자가 첨탑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은 유력 정치인들이 많이 다니는 걸로 유명한 교회였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나. 다니엘은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 위로, 반포대로, 라는 사인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오늘밤의 이 일들은 거의 모든 것이 다니엘에게는 낯설고 생경한 경험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반포라는 그 지명을 알아본 순간, 다니엘은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알아차렸다. 나침반의 바늘이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듯, 무언가를 향하는 자신의 마음이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었다.

다니엘은 핸드폰 액정에 표시된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새벽 한 시 반도 훨씬 지나, 이제 조금 있으면 두 시였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지도 몰랐다.

전화를, 할까.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가뜩이나 아르바이트니 뭐니, 저 나름 사는 것이 바쁜 녀석이었다. 집에 없을지도 모르고, 고된 일상에 지쳐 이미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저런 것들이 아니라도, 지금 자신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을지 어떨지, 그런 것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먼저 전화라도 해서, 받는지 어쩌는지를 보고.

그러나 액정 위를 머뭇거리던 손가락은, 다음 순간 굳어지듯 멈추었다.

전화 같은 거 하지 말고.


또 변명하게 될 것 같았다. 또 아무렇지 않은 척 하게 될 것 같았다. 입술에 익어버린 비뚤어진 말로, 네까짓 것 따위 내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전화를 끊기도 전부터 후회할 말을 기어이 해버릴 것만 같았다.

얼굴 보고 얘기하세요.


정작 얼굴을 보면 아무 말도 못할지도 모른다. 미안하다는 말도, 용서해 달라는 말도, 내게는 사실, 너를 그런 식으로 대할 자격 비슷한 것이 아무 것도 없더라는 말도, 아무 것도. 어쩌면 또, 입에 익은 못된 말들만 줄줄이 뱉어내다가, 때 아닌 후회에 가슴만 때리며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게 뭐든 간에.


전화 하지 말고, 얼굴을 보고 말하라고. 그것이, 30년간이나 모르고 지냈던 '동생'이 오늘 그에게 해 준 충고였다. 그리고 도보에 그리 익숙하지도 않은 자신의 걸음이, 알 수 없는 본능으로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을 깨달은 순간, 다니엘은 그 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직시했다.

이미 적지 않은 길을 걸어온 다리가 저릿하게 아팠다. 다니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로등 불빛과 간판 불빛, 갖은 야경에 가려진 밤하늘은 그저 검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별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 그 녀석이 있다.

키스를 했고, 심지어 자기까지 했는데, 정작 다정스레 손 한 번 잡아준 기억이 없었다. 아마도 순탄치 않았을 그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놓고도 힘들었겠다는 입에 발린 위로 한 마디 해 주지 못했다. 어디에 사는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선뜻 건네 준 커피 한 병을, 정작 지훈을 위해서는 사 준 적이 없었다. 그 모든 순간이, 깨어져 흩어진 유리 파편처럼 쏟아져 마음을 찔렀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내 삶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한 번 방향을 가늠하고, 다니엘은 다시 걸음을 떼었다. 한 발, 두 발, 걷던 걸음의 보폭은 조금씩 빨라져, 달음질로 바뀌었다. 보행 신호가 들어오지 않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형광등이 나가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를 지나, 그는 그렇게, 탁한 공기가 내린 새벽의 도시를 숨이 차도록 무작정 달렸다.

숨이 차도록, 가슴이 터지도록 지훈이 보고 싶었다.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