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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V

-견딘 적 없습니다.











벨이 울렸다.

잠시 바깥을 한 번 쳐다보다가, 다니엘은 모르는 체 시선을 돌렸다. 누군지 몰라도 굳이 나가서 응대를 해야 할 사람일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 문 밖에 와서 서 있는 것이 누구든, 그 사람을 어떤 얼굴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확신이 없기도 했다.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체 숨어 있고만 싶었다.

그러나 벨은 두 번 세 번 계속 울렸다.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빨리 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다니엘은 어쩔 수 없이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띠릭거리는 소리를 내고 문이 열리는 순간, 가벼운 긴장감에 잠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계셨습니까.”


문 밖에 선 것은, 우진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흐트러진 곳 한 군데 없는 정장 차림에,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웬일이고.”


그렇게 묻고서야, 자신이 지금 사흘째 회사를 결근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니엘은 쓰게 웃었다.


“시건방 좀 떨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진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술 한 잔만 받아주십시오.”
“….”


다니엘은 물끄러미 우진을 바라보았다. 술 같은 것은, 딱히 마실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금 누군가와 술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우진일 터였다.


“그래. 그러자.”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온나.”










다니엘은 원래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다. 주종도 주량도 그다지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어지간한 술자리는 거의 언제가 다니엘이 정리를 맡았다. 술에 취해 널브러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건사해 차에 태워 집으로 돌려보내고 술값을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약간의 취기는 있을지언정 필름이 끊어지거나 블랙아웃이 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속이 빈 탓인지, 며칠이나 속을 끓인 탓인지, 전에 없이 빨리 취기가 올랐다.

우진이 사 온 소주가 몇 순배 도는 동안 다니엘은 말없이 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이 일련의 일들에 대해 어디까지를 알고 있는 건지가 궁금했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랬다. 자식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은 남자로서의 큰 흉이니, 아버지가 그 일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우진의 경우는 마냥 그렇게만 확신해 버릴 수도 없었다. 지훈의 집 비밀번호까지를 다 알 정도니, 어쩌면 모두 다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사님, 이번 일 아무래도 좋게 넘어가시기 힘들지 싶습니다.”


한참 혼자 그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 있을 때, 우진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캐나다 쪽에 실적 안 좋은 현지 법인이 하나 있는데, 그냥 그리로 보내실 것 같다고.”
“….”
“회장님이 집에서 근신하라 하셨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나갔다 오신 게 들키는 바람에.”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여기 온 그 날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우진이 그러하듯, 아버지에게도 이런 저런 뒷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지훈의 집에 찾아간 일이 그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놈이 마음으로나마 아들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훈의 집까지 찾아간 것을, 아무래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새삼 입맛이 씁쓸해 왔다.


“아저씨한테는, 연락 종종 드리나.”


우진의 아버지는 몇 년 전, 심 회장에게서 적지 않은 퇴직금을 받아 호주로 이민을 갔다. 험한 일을 하며 돈을 벌던 세월이 남아 있어 여기서는 두 다리 뻗고 살기 힘들 테니, 기후 좋은 곳으로 가서 속 편하게 살라는 그녀의 배려였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모두 호주로 떠나 버리고, 우진만 한국에 남아 있었다.


“예, 뭐.”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사님이 살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계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도 설은데, 별 일은 없으시다드나.”
“예.”


분명 저가 사흘째 결근 중인 걸 알고 왔을 테면서, 우진은 전에 없이 변죽만 울릴 뿐 본론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다니엘은 짐짓 술병을 들어 우진의 잔을 채워 주었다.


“아버지가, 이민 가시기 전날 밤에 술 한 잔 먹자고 부르신 일이 있었습니다. 머리 굵어지고 나서도 생전 그런 말 없던 양반이라서, 뭔 일인가 했었습니다.”
“….”


다니엘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우진을 알고 지낸 것은 이미 10년도 훨씬 넘었다. 그러나 그 길다면 긴 시간 중, 우진이 제 입으로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희 아버지야 뭐, 실장님도 아시는 대로,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닥치는 대로 살다가, 여사님이 거둬 주셔가지고 사람 구실하면서 살게 된 그런 사람 아입니까.”


심 여사가 40대 후반 쯤 되어 여기저기 월변을 놓고 돈놀이를 하고 다니던 시절, 우진의 아버지는 그 밑에서 돈을 수금하러 다니는 일을 했다. 숫자 셈은 느렸으나 시키지 않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어,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더라 했다. 일평생 제 속에 든 말이라고는 않던 사람이, 어느 날 하루는 제 평생에 단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 제 자식 놈만은 이런 일을 하면서 살게 하지 않는 거라고,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심 여사는 그 말을 듣고, 그 길로 우진을 데려다 다니엘의 옆에 붙였다. 우진은 그렇게, 대를 이어 다니엘의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가, 그 날 그러시대요. 평생에 마음 준 여자가 딱 한 명 있었는데, 그게 느그 엄마는 아니라고요. 결혼 전 일이라, 그나마 그거로 면피한다고.”
“….”
“짠한 여자였다고.”


우진은 잠시 말을 고르듯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억지로 시집가서,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임신 안 돼서 구박 받고.”
“….”
“그 때마다 친정으로 쫓겨나듯 도망 와서는 몇 날 며칠을 울다가, 그래도 다시 한 번 잘 해보겠다고, 핼쓱한 얼굴에 억지로 웃으면서, 내가 이래 순순히 나가 떨어지믄 우리 엄마 딸이 아니라고, 그래 돌아가곤 하는, 그런 여자였다고.”


어째서일까, 마시던 술이 턱 하고 목에 걸렸다.


“그러다가 하루는, 그러더랍니다. 내 그냥 죽어버릴까, 하고. 손목이라도 그으믄, 서까래에 목이라도 매달믄, 치마 덮어쓰고 옥상에서 뛰어라도 내리믄, 그때는 내한테 조금이라도 안 미안해하겠나, 하고. 하지 마라고, 그라지 마라고, 그 말 밖에 안 나오더랍니다. 당신이 그래 죽으믄, 내는, 어째 살라고 그러냐고.”
“….”
“아버지 말씀으로는, 첫날밤이, 그냥 마지막 밤이었다고.”


멍하니 고개를 드는 다니엘의 눈에,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우진의 얼굴이 잡혔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자신의 뒤를 지켜온 우진이, 어쩌면 영 남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니 지금, 그 말이.”
“….”
“그 말이, 도대체.”
“뭐, 저도 거기까지밖에 모릅니다. 아버지가, 거기까지밖에 말 안 해주셨거든요.”


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만, 실장님 잘 모시라고. 그래만, 말씀하셨습니다.”
“….”


술잔을 사이에 두고, 사실은 꽤나 닮아 있었던 시선이 조용히 맞부딪혔다.

아버지라고 믿었던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집안이라고 믿었던 것도 자신의 집안이 아니었다. 자신과 정말로 피가 섞인 사람은, 지금은 살아 있지 않은 어머니와 외할머니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비록 절반일 뿐이지만 내가 당신과 피를 나누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생겼다.


“니는, 그동안.”


할 말이,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를, 어떻게 견뎠노.”
“견딘 적 없습니다.”


우진은 담담하게 웃었다.


“세상사람 아무도 몰라도, 저는.”
“….”
“형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압니다.”


형님. 그 한 마디에 울컥 목이 메어,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힘드신 거 압니다. 안 힘들기 어려운 상황인 거도, 제가 다 압니다.”


이런 신파조의 말을 하려면서, 그래도 우진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하고 무뚝뚝했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은, 그런 일 겪지도 못한 제가 감히 훈수 둘 일은 아니지만은.”
“….”
“그런 일이 있었다고, 형님이 뭐, 형님 아니게 되겠습니까.”


우진은 말없이 손을 뻗어 비어버린 다니엘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 친구 생각도, 하셔야지요.”
“….”
“형님 회사 안 나오시는 동안에, 그 친구 사옥 앞에 매일 매일 와서, 30분씩 한 시간씩 뱅뱅 돌다가 집에 가고 그랬습니다. 영 보기 딱하던데요. 그냥 그래 놔 둘 겁니까. 남자가.”


‘심복’이 아닌 ‘동생’이 된 우진의 말투는, 그래도 아주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이 일 아는 사람, 아마 이 집안에서는 이사님 한 분 밖에 없지 싶습니다. 뭐, 남자 입장에서 불임인 게 자랑도 아니고요. 이제 와서 이 일 다 떠벌릴 용기도 아마 없을 겁니다. 잘 아신다 아입니까. 어떤 사람인지.”


그 무렵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다니엘도 들은 바가 있었다. 맡는 계열사마다 말아먹기를 서너 번, 정말로 내쳐야겠다 마음먹은 그 때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했고, 애까지 들어선 가장을 함부로 내칠 수가 없어 집안에 붙여두었다는 말은, 아버지가 사고를 칠 때마다 할아버지가 되풀이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한량이라고는 해도 아버지 역시도 이 집안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이용할만한 가치가 없었더라면,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집안에서 자라도록 묵인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한남동 회장님 내외,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습니까.”
“진아.”
“그 때까지만 버티면, 다 형님 겁니다.”


단순히, 비슷한 사투리를 쓴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었을까. 다니엘을 바라보는 우진의 눈은 전에 없이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버티세요. 그리고.”


되돌아갈 용기가 없다면,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행복해지세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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