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S

-손만 잡고 잘게.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쳐다보는 눈이 애틋해서, 조르는 목소리가 안타까워서,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저 단순한 원나잇 상대이기만 했더라도 거리낌 없이 그렇게 했을 터였다. 아버지. 그 빌어먹을 이름만 떠오르지만 않았더라도. 지훈이 온기를 바랄 대상은 최소한 자신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르지만 않았더라도.


“미쳤냐?”


그래서 그렇게 대꾸했다. 제가 생각해도 정이 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그따위 소리는 아빠한테나 해.”


물론 그 ‘아빠’라는 작자는 제가 가진 돈으로 양아치 짓을 하다가 곤욕을 치르는 중이라, 네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너를 안아주러 여기 오진 못하겠지만.

혹시나 손목이라도 그었거나, 약이라도 먹었거나, 기타 등등의 골치 아픈 일을 저지른 거나 아닌지, 그게 신경 쓰여서 와 봤을 뿐이었다. 그까짓 몸살이라면 며칠 이불 둘러쓰고 푹 자면 나을 일이었다. 그런 거라면 자기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자던 잠이나 마저 자. 갈 거니까.”


그게 뭐가 됐듯, 여기까지였다. 그렇게 선을 긋고 다니엘은 돌아섰다. 그러나 힘이 빠진 지훈의 손은 기어이 돌아서는 다니엘의 재킷 자락 어딘가를 붙잡고 늘어졌다.


“얼마면 돼요?”


뭐라는 거야.

물론,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실제로 입 밖에 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는 다니엘이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낼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넘어왔으므로. 혹시나, 저따위로 말하는 버릇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에게 배운 게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니 울컥, 속이 뒤틀렸다.


“비싸게 굴지 말고, 좀.”


그러나 그런 다니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얗게 마른 입술은 힘없이 달싹거렸다.


“손만 잡고 잘게….”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오래 전도 아니다. 이틀 전인가. 별장의 거실에서, 침실에서 몸을 섞은 것이. 그 행위에 제 뜻이 얼마나 섞여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이미 그렇게 보여서 될 것 안 될 것을 전부 내보여 놓고. 그렇게까지 해 놓고 이제 와서 겨우 바란다는 게.

그렇게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해 버렸다. 그렇게까지 한 마당에, 그 일 때문에 앓아누운 사람에게 품 한 번 내 주는 게, 그렇게까지나 못할 짓이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다.


“들어가.”


다니엘은 꿈틀거리며 몸을 뒤로 물리는 지훈의 옆을 밀고 들어가, 그 머리를 팔 위에 뉘었다. 내쉬는 숨에서 앓는 사람 특유의 단내가 났다. 이 자식 병원이나 갔다 오고 이러고 있나. 그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지훈의 침대는 좁았다. 조금 큰 사이즈의 싱글 베드였다. 매트리스는 그다지 푹신하지도, 탄탄하지도 않았다. 이런 호텔 침대만도 못한 데서 애를 건드리기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침대가 왜 이렇게 좁아터졌어.”


작은 키는 아니지만, 농구를 해도 될 만큼 큰 키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 자신조차 여차하면 발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갈 것 같았다. 물론 이제 키 같은 건 더 이상 안 클 나이긴 하지만, 이왕 16억이나 들여서 집씩이나 사 줄 거면 안의 세간도 좀 맞춰서 사 주든지.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느낀 것이지만, 이 집의 가구며 세간들은 그 중 어느 것도 다니엘이 알만한 것들은 없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마트 같은 데서 싸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다니엘이 알기로, 아버지가 자신과 놀아나는 상대를 이렇게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한테 침대나 좀 크고 좋은 거 하나 사달라고 해.”
“안돼요.”


지훈은 다니엘의 목덜미에 묻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 이 집에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빠한테 너무 폐 많이 끼쳤어요.”
“….”
“엄마가 아팠어요. 돈이 필요했는데 방법이 없어서 살던 집 보증금을 뺐거든요.”


이미 아는 이야기였다. 지훈의 어머니, 박지영이라는 이름의 그 여자는 작년 여름 세상을 떠났다. 췌장암인지, 여튼 병사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다 아는 걸로 할 수도 없어서, 다니엘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지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집 빼고 고시원에서 몇 달 지냈는데, 그 때 아빠가, 친구 분 중에 되게 돈 많은 분이 있대요. 돈이 너무 많아가지고, 집을 막 몇 십 채씩 사서 세 놓고 그러는 사람이라고.”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그러니까, 적지도 않은 16억이나 되는 돈을 들여 집을 사서는 애인의 명의로 해 주고도, 그걸 가지고 생색도 제대로 못 냈다는 이야기였다. 자살한 아내의 제삿날도 사람 풀어 잡아 오지 않으면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면서, 그 마음 어느 구석에도 이런 순정이 남아 있었느냐는 비아냥이 치밀어 다니엘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 중에 한 채가 전세 들어 살던 사람이 갑자기 외국 발령이 나서 외국 가게 돼서 집이 비었다고. 자기가 말해줄 테니까 들어가서 살면 된다고 그래서.”
“….”
“아빠가 그렇게 안 해줬으면 아직도 고시원에 살고 있겠죠.”


그 말에는 허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외국 발령을 받아서 나간다면서 집에 걸린 보증금도 빼지 않고 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설령 그런다 한들 보증금 한 푼 안 내고 몸만 들어와 사는 걸 허락해 줄 용한 집주인은 또 어디 있겠으며, 기타 등등.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지훈은 고스란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집은 다른 어느 돈 많은 사람의 소유이며, 자신은 전적으로 그 호의에 기대 여기 살고 있다는 말을.


“고시원 들어가면서 원래 살림들은 다 버렸어요. 놔 둘 데가 없으니까.”


땀에 젖은 머리칼이 드레스 셔츠의 깃을 헤치고 목덜미를 간질였다.


“여기 있는 것들은, 다 내가 돈 벌어서 산 것들이에요. 이 침대도.”


그 말에는, 어떤 엄숙한 종류의 울림이 있었다.


“이거 나름 좋은 회사 건데, 옆에 보면 스크래치가 좀 길게 나 있어요. 침대 옆에 스크래치 나 있나 아닌가 그거만 쳐다보는 사람이 어딨어요. 어차피 이불 덮어 놓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건데. 그래서, 반도 안 되는 가격에 산 거예요.”


순간, 어떤 종류의 위화감이 다니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었다. 흠집이 난 물건을 싸게 산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런 종류의 인간을, 아버지는 16억이나 들여 아파트를 장만해 주고도 생색 한 번 못 내가면서 왜 곁에 두고 있는 것일까. 지훈의 이야기 속에 그려지는 아버지는, 애인이라기보다는 오랜만에 해후한 ‘아버지’에 가까웠다. 우진이 그토록이나 딱 잘라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는 말을 하지만 않았더라도, 아버지의 애인이 아니라 밖에서 몰래 낳은 배다른 동생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프다더니 말만 많네.”


길어지는 생각이 주체가 되지 않아, 다니엘은 일부러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안 아픈 거면 나 가고.”
“아파요.”


등 뒤로 두른 팔에 꼬옥 힘을 주어 매달리며,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열도 나잖아.”


그는 다니엘의 손을 끌어다 제 머리 위에 댔다. 식은땀이 드문드문 맺힌 이마로는 꽤 뜨끈한 열이 올라 있었다.


“잠이나 자. 그만 떠들고.”


다니엘은 꼼지락거리는 지훈의 뒤통수를 꾹 눌러 품에 파묻었다. 구겨지는 데 익숙하지 않은 옷이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소매 끝으로 지훈의 목 뒷덜미에 흥건한 땀을 훔쳐냈다.


“실장님, 있잖아요.”


품 속에 파묻힌 채로, 지훈은 웅얼거리며 말했다.


“안 그런 척 하는데.”
“….”
“좋은 사람인 거 같아요.”


그 말은 바늘 같은 것에 손 끝을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왜.”
“엄마 아프셨다더니 어떻게 됐냐, 이런 거 안 물어보잖아.”


그거야, 다 알고 있으니까.

물론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치료를 위해 보증금을 빼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병이라면 암이거나, 그 비슷한 종류의 큰 병일 터였다. 그런 병이라면 낫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그 병에서 회복했다면 아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나 마음 아플까 봐.”


참, 어쩌면 저렇게 매사 제멋대로.

순간, 어째서인지 그린 게이블스에 처음 갔던 날 지훈이 반 강제로 손에 쥐어주었던 그 스탬프 카드가 생각났다. 그 카드를, 내가 어쨌더라. 버렸던가. 아니면 지갑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았던가.

그 날도, 그렇게까지 날을 세울 건 없지 않았을까.


“따뜻해….”


그 말은, 다니엘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머쓱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다니엘은 짐짓 헛기침을 했다.


“잠이나 자랬지. 무슨 사내자식이 이렇게 말이 많아.”


그런 타박을 들어놓고도 지훈은 계속 무어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꾸역꾸역 주워섬겼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어깨를 끌어안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 무어라고 계속 웅얼거리던 지훈의 말은 조금씩 잦아들더니 기어이 뚝 끊어졌다. 저도 모르게 눈 앞이 가물거렸다. 지훈이 잠들면 살짝 떼어놓고 나갈 셈이었는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간 꽤 피곤했던 모양이라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