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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L

-지금 이건, 날 건드려 달라, 뭐 그런 뜻인가?











어머니에게는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꽃이 피는 봄은 그녀에게는 고역이었다. 계속 재채기를 하다가, 콧물을 흘리다가, 눈물을 흘리다가, 급기야 눈이 빨갛게 충혈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봄이 되면 어린 다니엘의 손을 잡고 벚꽃이 많이 피는 곳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바람이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잎 아래에 서서도,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재채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건, 낫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글쎄, 아직은 없나 보더라. 아마도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내가 크면, 아주 훌륭한 의사가 돼서, 봄에도 엄마가 재채기를 하지 않는 약을 만들어 줄게.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아마도, 어머니가 그렇게나 빨리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정말로 알레르기성 비염 치료제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아니, 그런 건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 하나밖에 없는 그룹의 후계자가 다른 일을 하는 걸, 이 집안에서 두고 볼 리는 사실 없었으므로.

봄이란, 다니엘에게는 대략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타이를 졸라맨 목덜미가 갑갑해 오기 시작하는 건, 이제 슬슬 날이 따뜻해지고 있다는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이었다. 올라온 결재 서류 몇 가지에 무신경하게 사인을 하고, 다니엘은 문득 고개를 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의 사무실은 20층에 있었다. 벚꽃 같은 걸 보기에는, 지나치게 높았다.

하필이면, 이런 계절에.

어머니의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늦은 시간 차가 드문 국도변을 달리다가 차선을 보지 못해 중앙선을 넘었고, 그래서 마주 오는 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일어난 불의의 사고라는 것이 공식적인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사고를 조사한 보험조사원은 조금은 다른 말을 했다. 사고의 잔해에서는, 사고를 회피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어머니의 시신에서는 다량의 수면제 성분이 검출되었다. 그것은 오랜 불면증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의사의 처방을 받아 장복해 오던 수면제와 같은 것이었다. 그 약에 대해 잘 아는 어머니가, 졸음으로 즉각적인 반응이 힘들 만큼의 수면제를 먹고 차를 운전했다는 것은, 사실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유력 재벌가의 안주인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운전을 했다는 이야기 따위를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어머니의 죽음은 그야말로 불의의 사고로 포장되어, 재벌가에 흔히 닥치게 마련인 그렇고 그런 불행 중 하나로 조용히 묻혔다.

하필이면, 이런 계절의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그대와 단둘이 손잡고 알 수 없는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다니엘의 사무실 창문으로 흘끗 보이는, 건물의 전면을 가리는 대형 광고판에 한 달 전부터 걸려 있는 문구였다. 소담한 벚꽃 사진 옆에 캘리그라피로 적힌 가사 한 줄. 저 노래는 몇 년 전부터 이맘때만 되면 은근히 여기저기서 많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살아서 저 노래를 들었으면, 꽤나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이런 계절에.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열린 문으로 비서가 들어와 있었다. 우진 만큼은 아니라도 좀체로 말을 어물거리지 않는 그녀였지만, 어쩐지 지금의 표정은 어딘가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듯이도 느껴졌다.


“무슨 일이에요?”
“저.”


보다 못해 말을 걸어주자,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해 왔다.


“1층 인포메이션에서, 이런 게.”


비서의 손에 들린 것은 첫 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는 않은, 연분홍 색깔의 작은 상자였다. 손수건이나, 기타 그 비슷한 것이 들어있으면 딱 맞을 크기의 작고 두께가 얇은 상자. 그 옆면에는 흘려 쓴 필기체로 무어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까지 알아보기에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뭐죠, 그건.”
“어떤 분이 실장님께 전해 달라고, 인포메이션에 맡기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것까지는.”


인포메이션에서 이 때 아닌 상자를 전해주고 간 사람의 인적사항을 받아두지 않은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양, 그녀는 한참이나 말을 더듬었다.


“그냥 저, 어제 기다리다가 그냥 집에 간 사람이라고만 전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


박지훈.

그 장황한 설명이 결국은 지훈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느리고 둔탁하게 다니엘의 의식 속으로 꽂혔다.


“왜요?”


문득 그렇게 물어놓고야, 다니엘은 비서가 어제의 그 일과, 지금의 이 상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황황히 입을 다물었다. 다니엘이 말을 잊은 사이, 비서는 몹쓸 것이라도 치우듯 그 심란한 분홍빛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마치 사제폭탄이 든 상자라도 쳐다보는 기분으로 한참이나 상자를 쏘아보다가, 다니엘은 천천히 그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 든 것은 초콜릿이었다. 분홍색으로 코팅이 되고 그 위로 벚꽃 모양 데코가 올려진, 아마도 딸기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초콜릿. 이게 뭘까. 이게, 도대체, 뭘까. 순식간에 유클리드의 기하학 문제 앞에 선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 지훈이 보낸 사진 한 장. 다니엘은 핸드폰을 들어 사진 폴더를 열었다. 흰 탁자 위에 놓인, 입욕제로 만든 벚꽃이 한 송이. 그리고 지금 이 초콜릿도 벚꽃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카페 근처에 유명한 초콜릿 가게가 있어요 거기서 4월 한 달 동안만 파는 초콜릿이에요]


다니엘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런 문자가 떠올라 왔다.


[어제 고마웠어요]
“….”


고맙다.
도대체, 뭐가.

어제 쓸데없는 시비를 거는 작자들이 그렇게나 많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시간을 그렇게나 많이 뺏기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지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여섯 시까지 그 호텔로 가기만 했더라면.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 줄 알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핸드폰 액정 위로는 지훈의 전화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여보세….]
“뭐죠, 이건.”
[네?]


되묻는 목소리는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그것이 날 것 그대로의 지훈인 것 같아서, 되레 화가 났다.


[초콜릿인데요.]
“설마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걸까?”


되묻는 목소리에는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갔다.


“고맙다는 건 무슨 뜻이지?”
[네?]
“내가 어제 필요 이상으로 바쁘지만 않았다면.”


아무리 그래도 성인이었다. 호텔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뉘앙스를, 그 숨은 함의를 몰랐을 리는 없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소위 말하는 ‘연애’는 아니라는 것, 게다가 엄연히 다른 사람의 소유 하에 있을 것이면서, 자신의 난폭한 제의에 이렇게나 순순히 이끌려 오는 것, 그것도 모자라 어제 고마웠다는 어림없는 인사까지 건네 오는 것, 어느 것 하나 어이가 없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도대체 뭘 하자고 박지훈 씨를 그리로 부른 것 같아요, 내가?”
[….]
“그 넓고 좋은 객실에서 샴페인이나 마시자고?”
[….]
“그 푹신한 침대에서 숙면이나 취하자고?”


놀란 건지 말문이 막힌 건지 핸드폰 저 편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 감감한 핸드폰에다 대고, 다니엘은 물어뜯듯이 쏘아붙였다.


“지금 이건, 날 건드려 달라, 뭐 그런 뜻인가?”


히익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좀 더 저열하고 직설적인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그게 유감이었다.


[저는 그냥.]


더듬거리며 떨려나오는 목소리는, 딱했다.


[어제 너무 좋은 곳에서 하룻밤 편하게 자서요.]
“….”
[그냥 그게 고마워서.]


순진한 거라고, 좋게 생각할 수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순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훈은 이런 문제로 저렇게 반응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너, 지금 네가 살고 있는 그 집도, 그 순진한 얼굴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천진을 떨어서, 그런 식으로 뜯어낸 거냐고 묻고 싶었다.

지금 어디서, 개수작이냐고.


“지금 어디에요?”
[네? 그건 왜요?]
“고맙다며.”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건조하다 못해 냉랭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자신에게조차도.


“그렇게 고마운데, 이까짓 초콜릿 한 상자로 퉁치려는 거야? 너무 양심 없지 않나?”


다니엘은 열려 있는 상자에 들어 있는 초콜릿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예상한 대로 딸기 맛 초콜릿이었다. 은은한 벚꽃 향도 났다. 벚꽃은 향이 없다고,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아주 냄새에 예민한 사람이나 알아차릴 수 있는 극히 미미한 향이 난다고, 사람들이 벚꽃향이라고 알고 있는 그 향은 어떤 조향사가 체리와 다른 꽃들의 향을 조합해서 만든, 벚꽃의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향일 뿐이라고 전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너의 그 순진무구함도, 마찬가지로.


[저…는 지금 지하철 타러 가려고….]
“내가 나가기는 애매하네.”


다니엘은 모니터에 띄워져 있던 이런 저런 문서들을 하나하나 끄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골치 아픈 결재는 조금 전 이미 다 끝낸 참이었다.

그렇게나 고맙다면, 고마운 값을 받아주면 될 일이었다.


“기어들어와.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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