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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J

-너도 오늘, 꽤나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나처럼.











아침나절에 기분 상한 일이 생기면 그 기분이 잠자리 들 때까지 간다는 것은 다니엘 나름의 징크스 같은 것이었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언짢은 소리를 듣거나 등굣길에 교문을 지키고 선 선생들에게서 자잘한 지적을 당한 날은 하루 종일 일진이 사나웠다. 그래서,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가 자리에 앉은 후, 언제나처럼 확인한 메일함에 들어있는 로펌에서 보내온 메일을 본 순간, 다니엘은 그 메일의 내용이 그다지 우호적인 내용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젠 슬슬, 플랜 B를 시작해야 할 타이밍인가.

그 때 책상 위의 인터폰이 울리고, 이사님 운운 하는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엉덩이가 무겁구나.”


나직한 그 목소리는 명백하게 빈정거리고 있었다.


“애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사를 봤으면 인사 정도는 좀 하는 게 맞지 않냐?”
“인사 받으러 참 멀리도 걸음하시네요.”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객실에서 손님을 맞는 스튜어디스들이 그렇게 하듯, 두 손을 배꼽 앞에 모아 쥐고 허리를 직각에 가깝게 숙였다.


“납시셨습니까.”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인사를 하믄 한다고 뭐라 하고, 안하믄 안한다고 뭐라고 하고.”


아버지를 내려다보는 다니엘의 눈매는 싸늘하게 빛났다.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늘 그런 식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사내자식 책상물림을 어디에 쓰느냐며 빈정거렸고 친구들과 어울려 밖으로 쏘다니면 그래가지고 이 큰 회사를 어떻게 물려받겠느냐며 이죽거렸다. 처음엔 어떻게든 잘했고 수고했다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어 밤을 새고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했고, 학생회장을 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봉사를 다녔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에서는 고생한다는 말 한 마디가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엔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성바이오 건은, 어떻게 돼 가는 거냐?”
“설명 드리면.”


다니엘의 입매가 야멸치게 다물어졌다.


“알아는 듣습니까.”


굿모닝.

갑자기 그 문자가 떠올라 울컥 속이 뒤집어졌다.

그 자식한테도 이딴 식으로 말하는지, 그걸 물어보고 싶어졌다. 반포 한복판에 16억이나 되는 아파트를 해 준 것도 모자라서, 짬만 나면 피자니 치킨이니 사들고 들어가 낄낄거리면,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지를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 자식의 집에 가서도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하라고 꼰대질부터 하는지를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마도, 아니겠지.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잡수세요. 알지도 못하는 일에 끼지 말고요.”
“뭐?”
“식자우환識字憂患, 이라고, 굉장히 좋은 말이 있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냥 살던 대로 사세요, 강승태 이사님.”










플랜 B애 대한 미팅이 끝난 것은 저녁 8시도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저녁도 거른 상태였지만 입맛이 없어 뭘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길어진 미팅 내내 물처럼 들이킨 커피 때문인지 속이 쓰린 탓이기도 했다. 입 속으로 지긋하게 신물이 고였다. 이럴 때 음식을 잘못 먹다가는, 오늘 새벽쯤엔 아마도 역류하는 위산 때문에 벌떡 일어나 앉게 될 것임을 다니엘은 경험으로 알았다.

운전석에 앉아, 다니엘은 잠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기사 같은 것은 비위에 맞지 않아 늘 혼자서 운전하고 다니는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누가 대신 운전 좀 해 줬으면 하는 생각에 몸이 축 늘어졌다. 다니엘은 지친 손으로 핸드폰 액정을 뒤져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문자 메시지와 알람을 하나하나 읽고 지웠다.


[저 오늘 다섯 시에 알바 가야 돼요]


그리고 그의 손가락은 그 문자 위에서 멎었다.

박지훈. 그 전화번호는, 더도 덜도 아닌 그런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다니엘의 손가락이 액정을 미끄러져, 오늘 하루 지훈에게서 들어온 문자를 주루룩 읽어 나갔다. 지훈에게 H호텔의 객실 번호를 알려준 것이 오늘 2시 조금 지나서였고, 그 후로도 다섯 통이나 되는 문자 메시지가 띄엄띄엄 들어와 있었다.


[죄송한데, 오늘 꼭 가야 되나요?]
[실장님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요]
[여긴 무슨 일로 오라시는 건데요?]
[호텔이잖아요]
[굿모닝]


순간, 오늘 하루의 일상에 치여 채 곱씹지도 못했던 이 문자 메시지의 내용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버지와 싸우고, 제약회사 사람들과 싸우고, 로펌의 실무진들과 싸우는 동안, 마치 배경음악처럼, 혹은 시간을 알려주는 알림음처럼 더러더러 튀어나와 주위를 흐트려 놓던 그 문자메시지들. 시계는 어느새 8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거기서 벌어질 일이 어떤 건지를 알면, 더더욱.


“운이 좋네, 박지훈 씨.”


다니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본래 지훈에게 보여주려던 것을 보여주기에는, 오늘은 자신이 너무 많이 피곤했다.










언제까지나 주차장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다니엘은 손을 들어 목 뒤를 몇 번 주무르고, 시동을 건 후 차를 출발시켰다.

음악을 듣는 것조차 번거롭고 귀찮은 날이었다. 음악도, 라디오도 나오지 않는 차 안은 조용했다. 엄연히 저녁을 지나 밤을 향해 가는 시간이었지만 차는 끊임없이 밀렸다. 문득 담배가 말려, 다니엘은 차창을 내려 열고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몸이 이렇게 피곤해서야, 오늘은 간만에 잠이나 푹 자겠다고,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은 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이 사거리는, 1, 2차선이 좌회전이었다. 2차선은 직진도 가능하긴 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좌회전을 해야 했으므로, 다니엘은 2차선으로 차를 붙였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여기서 좌회전을 하면 집이고, 직진을 하면 H호텔이다.

아직도, 있을까.










프런트에서 멤버쉽 확인을 받고, 다니엘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머리가 지끈거려, 차가운 엘리베이터 벽에 저도 모르게 이마를 댔다.

반쯤은 허탕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뭐, 그 핑계로, 호텔 스파에서 목욕이나 좀 하고, 편안하게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터였다. 가뜩이나 편한 잠을 자지 못하는 터에 자리가 바뀌는 것이 좀 불안하긴 했지만, 오늘은 그만큼이나 피곤하니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호텔의 가장 꼭대기 층, 혼자 자리한 펜트하우스 앞에서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숨을 한 번 고르고, 다니엘은 카드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객실 안은 조용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하기야, 바보가 아닌 이상,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바라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다음 순간, 다니엘은 가만히 그 자리에 발을 멈추었다.

지훈은 소파에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늘 쓰던 안경을 그대로 쓴 채, 손에는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평범한 청바지에, 평범한 니트 차림, 도대체 이런 꼴로 어떻게 호텔 프런트를 통과해 여기까지 왔는지 장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다니엘은 가만히 그 곁에 서서 잠이 든 지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을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지훈의 이런 부분이었다. 무방비한 것, 순진한 것, 때묻지 않은 것. 그게 정말로 그런 거라면, 그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다니엘은 지훈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반포의 16억 아파트. 그다지 싸지 않은 사립대학교 미대의 한 학기 등록금. 그리고 그 외에 아마도 지훈이 누리고 있을 이런저런 것들. 그런 것들은, 공짜로 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미 제 젊은 몸뚱이를 내던져 그런 것들을 누리고 있을 테면서, 그 순진하고 예쁜 얼굴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낯을 붉히는 그 얼굴은 뻔뻔했고, 불쾌했다. 지금처럼.


“그런 주제에.”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뭘 잘했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그러나 잠이 든 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몸을 굽혀, 핸드폰을 쥔 지훈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의외로, 곱지만은 않은 손이었다. 남자의 손 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그 손은, 군데군데 상처도 있었고 튼 곳도 있었다. 미술하는 사람의 손이니 마냥 섬섬옥수일 리는 없다지만, 그 손은 그가 견뎌내고 있는 나름의 고단한 일상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니엘은 문득, 우진의 보고서에 적혀 있던 항목을 떠올렸다. 지훈이 일주일에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는 총 세 개였다. 얼마 전까지는 다섯 개였다고 했다.

너도 오늘, 꽤나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나처럼.

다니엘의 손이 가만히, 지훈의 얼굴 쪽을 향했다. 그리고 콧잔등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안경을 벗겨냈다. 그 안경은 얇고 가벼운 금속으로 만든 아주 흔해빠진 디자인이었다. 거창하게 집어던지거나 발로 밟지 않아도, 손으로 꾹 쥐는 것만으로도 휘어버릴 것 같은 아주 가벼운 안경이었다. 다니엘은 안경을 치켜들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경의 안과 밖은, 크지는 않아도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

오늘은 그냥, 바람을 맞힌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눈도 별로 나쁜 것 같지도 않은데.”


다니엘은 안경을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잠든 지훈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 위로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010-****-****
전화해서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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