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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난반사亂反射 H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그런 식이잖아요.











그 후로 수 초간, 좁은 편의점 카운터 매대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명백한 적의에 지훈은 놀란 것 같았다. 활짝 열린 둥글고 커다란 눈은 소리 없이 떨고 있었다. 그 얼어붙은 표정은 새삼 다니엘을 화나게 했다.

고작 이 정도의 말로, 저렇게나 놀란단 말이지. 다니엘은 이를 꽉 악물었다. 내가 아는 사실을 다 말한 것도 아니고, 지금 일어난 일이 우연이 아닌, 내 의도였다는 사실을 밝힌 것 정도만으로. 그런 새가슴으로, 엄연히 가정이 있는 환갑 가까운 늙은이의 애인 노릇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냐는 빈정거림이 입 속을 맴돌았다.


“그럼, 힌트는 여기까지 하죠.”


그러나 다니엘은 그 쯤에서 그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답 정도는 스스로 찾도록 하고.”


매대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들고, 다니엘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편의점에서 나갔다. 이것도 너무 나간 거라는 자각이 찌릿하게 뒤통수를 울렸다. 애초에 이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내 입을, 내 손을 더럽히며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며 다니엘은 축축하게 땀이 밴 손을 아무렇게나 재킷 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아주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뭔가를 만진 느낌이었다.


“저기요.”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므로. 여기서 발걸음을 멈춰봐야 들을 말은 뻔하므로. 그리고 그 말은, 지금의 뒤집힌 심사에 불을 지를 것이 분명했으므로. 짐짓 못 들은 체, 다니엘은 걸음을 재촉했다. 일단은 차로 돌아가야 했다.


“저기요!”


대답을 하지 않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뛰어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마르고 가벼운 발소리가 등 뒤로 따라붙더니, 덥석 소매를 붙잡았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잡힌 소매를 홱 잡아채며 몸을 틀었다.

안경 너머 쳐다보는 눈과, 결곡하게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만 말하고 가면, 어떡해요?”


씨근거리며 되물어오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뭐?”
“그렇게만 말하고 가버리면…!”


제법 고함 비슷한 것도 지를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제야 다니엘은 지훈을 돌아보았다.

이런 얼굴을 할 줄 아는 녀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을 만난 것은 오늘이 네 번째, 그러나 캄캄한 새벽 거리 창백한 가로등 불빛 아래 보이는 그 얼굴은 앞전과는 분명 어딘가가 달랐다. 떨리는 눈은, 입술은, 목소리는 간절했고 절박했으며, 보기에 따라서는 제법 사람의 아픈 데를 찌르는 데가 있었다.


“왜.”


되묻는 지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왜 날 괴롭히는 건데요?”


그러게, 그 말에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으면 나도 참 좋겠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왜 쫓아다니기까지나 하면서.”
“….”
“나 같은 걸.”


이 녀석의 이런 얼굴이 좋았나요, 아버지.
우는 것도 아니고, 안 우는 것도 아닌, 이런 물기 머금은 얼굴이.


“답은.”


스스로도 해답을 찾지 못한 다니엘의 입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차가운 말투가 떨어졌다.


“스스로 찾으랬지.”
“….”
“남이 떠먹여주는 거 기다리는 건 좀 작작 하고.”
“그 문제, 내가 맞출 수 있기는 한 거예요?”


그러나 지훈의 대답은, 또 다니엘의 예상과는 한참이나 다른 어떤 것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그런 식이잖아요.”
“….”
“나 같은 사람은 알 수도 없는 룰을 마음대로 만들어놓고, 그거 다 피해서 여기까지 와보라고. 그게 당신들 식이잖아요. 아니에요?”


지훈을 내려다보는 다니엘의 눈매가 힐끗 가늘어졌다. 역시, 그랬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처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자식은 이미 이런 식으로 많이 굴려져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 답.”


그런 다니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찾으면.”
“….”
“찾아지기는 하는 거예요?”


실은, 그 말이야말로 다니엘이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내가 과연 어떤 대답을 가질 수 있기는 한 것이냐고.

다니엘은 지훈의 손목을 잡았다. 살집이 별로 없는 손목은 별로 어렵지도 않게 다니엘의 손 안에 가뿐히 들어와 잡혔다. 지훈은 움찔 놀라 손을 잡아챘지만, 다니엘은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그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이거 놔요.”
“먼저 잡은 건 그쪽인데.”
“이거 놓으라고요.”
“잡으면 잡혀주고, 놓으라면 놓고, 내가, 그래야 되나?”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가던 중이었다. 환하게 불이 켜진 편의점 앞에서도 한참이나 벗어난 골목 어귀에서, 다니엘은 지훈에게 붙잡힌 참이었다. 요즘의 도시에는 밤도 없다지만, 그것도 어디에나 그렇지는 않았다. 몇 발 떨어진 곳에 매달린 창백한 가로등 불빛이 아니라면, 이 거리는 완벽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것 좀 놔요…!”


다니엘은 지훈의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기를 쓰고 뻗대는 몸을 끌어당겨 벽으로 떠밀고, 그 몸을 제 체중으로 눌렀다. 숨이 밀려나오는 소리가 났다. 제법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는 있었지만, 손목을 붙든 악력만으로도 다니엘은 지훈이 제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떡하면 좀 더 잔인하게 너를 모욕할 수가 있을까.

다니엘은 몸부림을 치는 지훈을 몸으로 누르고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완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겠다는 것을 알아챈 지훈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눈을 꼭 감은 채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버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때 아닌 상황에 놀라고 당황한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그는 힘을 주어 입을 다문 채 입술을 열지 않았다. 답지 않게도.

다니엘은 입을 벌려 지훈의 입술을 통째로 입 속에 머금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입 속에 들어온 그 입술은 마치 갓 잡은 짐승의 생살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키스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네까짓 게 아무리 발악해봤자 소용없다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충분했으므로.

지훈은 떨기 시작했다. 때 아닌 비를 맞은 작은 동물 같았다. 이러다가 울기라도 할까 싶어서, 그런 꼴까지 보고 싶지는 않아서, 다니엘은 물었던 지훈의 입술을 놓고 조금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도 꽤나 한참동안, 지훈은 꼭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


그리고 한참 후에야 지훈은 눈을 떴다.

그 눈은 얼음처럼 질려 있었다. 멍하게 질린 채, 다니엘을 향하고는 있었으나 그를 보지는 않고 있었다. 몸싸움을 벌이는 통에 흘러내린 안경 위로 치뜬 눈은 떨림조차 잊을 만큼 질린 주제에, 등 뒤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제법 새파랗게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훈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더러운 것이라도 훔쳐내듯이. 그 별 것 아닌 움직임에, 조금 진정되었던 박동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네까짓 게 뭔데, 그걸 닦아내느냐고 버럭 고함을 질러주고 싶어 다니엘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뭔데요.”


되묻는 목소리는 너무 작고 떨려서, 알아듣기도 쉽지 않았다.


“왜 이런 걸, 나한테.”
“….”
“설마.”


그러나 다음 순간 나온 지훈의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날아와 다니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날 좋아해요?”


순간, 어이가 없어 웃어버릴 뻔 했다.

다니엘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다시금, 지훈의 코끝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훈의 온 몸은, 이제는 차마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이미 다니엘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아니.”


다니엘은 이를 갈 듯, 치를 떨 듯 대답했다.


“난 당신 안 좋아해, 박지훈 씨.”
“….”
“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방금 같은 짓은 안 했어.”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맺힌 것 같았다. 기분 더럽게도.


“그러면 왜.”


지훈은 떨리는 입술을 열어, 겨우 물어왔다.


“그러면서, 왜요.”
“….”
“이런 건, 좋아하는 사람하고나 하는 거잖아요.”


그러게. 아마도, 네가 아버지한테나 하듯이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차올랐던 분이 식는 기분이었다. 이걸로, 그 거창한 사랑 놀음에 조금이나마 흠집을 냈다는 치졸한 승리감에.


“잘 들어.”


물론, 이게 다는 아닐 예정이었다.


“난 너를 안 좋아하지만, 아니, 싫어하지만.”


이제야,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카페 구석 탁자에 앉아 식지 않는 분노로 몸을 떠는 것 말고, 제 것도 아닌 카페를 인수하느니 마느니 하는 영양가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것 말고, 정직원으로 일할 자세가 돼 있느니 없느니 하는 쓸데없는 빈정거림을 퍼붓는 것 말고, 좀 더 실제적으로, 너를 상처 입히기 위해서.


“넌 나하고 키스하게 될 거고.”
“….”
“나하고 자게 될 거야.”


약한 짐승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맹수는, 아마도 이런 기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일 테였다.


“알겠어요, 박지훈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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