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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END

Epil.

며칠 후, TFT 내에는 대대적인 인사발령이 있었다.

서울과 경기도, 인천까지를 총괄하는 경인지부의 관할 지역이 너무 넓어 효과적인 집행방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판단 하에, 경기도 외곽 지역에 분소를 설치하고 상주 인력을 배치한다는, 겉으로만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인사발령이었다. 총 3개 분소가 설치되었고, 분소당 1개 분서씩이 상주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중에는 11분서도 있었다.

분서 해산이 없이, 분서가 통째로 분소 근무 발령이 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이유를, 성우는 ‘관리의 편의성’에서 찾았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사람들이어서, 괜시리 해산을 시켜 여기저기 퍼트려서 물을 흐리느니 한 군데 모아놓고 일이나 시켜먹자는 것이 본청의 판단인 모양이었다. 그의 판단은 그랬다. 그리고 모든 분서원들이 그의 판단에 동의했다.

11분서의 관할 지역은 양평과 여주, 이천까지의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인구 수는 적다지만 관할 지역 자체가 물리적으로 넓었고, 예전 서울에 있을 때는 한 시간 남짓이면 이동이 가능했지만 가끔은 출근하자마자 움직여야 겨우 당일 스케줄을 맞출 수 있을 때도 있었다.

사용되는 비품은 매주 금요일 오후에, 지훈과 민현이 서울 본원으로 올라가 직접 수령해 와야 했다. 비품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각종 총기와 탄환들이었으므로 민현의 차에 다 실어지지가 않아, 금요일만은 우진과 민현이 차를 바꾸었다. 본원에 들를 때면 민현은 시설에 들러 대휘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연구는, 느리지만 그렇게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내 쪽에 조그마한 아파트를 하나 얻은 다니엘과는 달리, 성우는 조금 외진 곳에 타운 하우스 하나를 얻어 거기에 짐을 풀었다. 넓지 않은 정원에 제법 운치가 있는 테라스까지 붙은 꽤 아담하고 예쁜 집이었다. 정원에는 개를 한 마리 키웠다. 이름을 일레븐에서 따 ‘이레’라고 지은 이 개는 딱히 품종이 있거나 혈통이 좋은 개는 아니었는데, 누런 털에 축 처진 귀가 제법 애교스러운 토종개였다. 덕분에 다니엘은 우리도 강아지든 고양이든 키우자는 지훈의 성화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딱히 당직근무가 잡히지 않는 주의 금요일에는 대부분 근무를 마친 후 성우의 집 정원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삼겹살을 사다가 구워먹을 때도 있었고 치킨 몇 마리를 시켜다 맥주와 함께 먹을 때도 있었다. 가끔 이것도 저것도 귀찮은 날에는 그냥 커다란 냄비에 라면 몇 개를 끓여서 찬밥을 말아 다 같이 먹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함께 축구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가끔은 화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우진은 예외였다. 혼자 이 곳으로 이사를 오지 않은 그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 곳에서 서울까지는 얼추 차로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거리였지만 그는 독야청청 출퇴근을 고수했다. 그렇게 뻗대지 말고 그냥 편하게 이사를 오라고 주변에서 몇 번이고 권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한우였다. 치료제 연구가 조금 진전이 있어 기분이 좋아진 민현이 쏘는 고기였다. 이 곳으로 내려온 후, 민현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성우가 집 얻는 데 돈을 보태고 같은 집에 살기 시작했다. 온갖 책과 연구 자료를 다 들이고 나니 돈은 반만 냈는데 집의 3분의 2를 차지한 꼴이라며 민현은 머쓱해 했다.

“지훈아, 거기 상추 좀.”
“네.”
“고기 다 타겠다. 얼른 먹어라. 소고기는 원래 한 번만 뒤집고 먹는 거다.”
“분서장님도 좀 드세요. 오늘 통 못 드시네.”
“아냐. 많이 먹고 있는데 뭘.”

그렇게 서로서로 익어가는 고기를 권하는 사이, 다니엘은 옆에 놓인 술병을 들고 우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나 우진은 기어이 고개를 저었다.

“술 안합니다. 운전해야 되는데.”
“자고 가라.”
“어데서요.”
“여기 사는 사람이 몇 명인데 니 하나 잘 데 없겠나.”
“됐습니다.”

우진은 어림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업무 중에 눈치 보는 거도 모자라서 퇴근하고 나서까지 커플 사이 끼어 있으라고요. 절대로 사양입니다.”

기어이 손을 내저어 술을 사양한 그는 상추에 고기쌈을 싸서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니도 웬만하믄 여 내리온나.”

그는 이왕 들었던 술병으로 비어버린 자신의 잔을 채웠다. 곁에 앉았던 지훈이 어디서 본 건지 소주잔에 손 끝을 슬그머니 대었다. 다니엘은 그런 지훈을 보고 피식 웃었다.

“서울에 뭔 꿀단지를 파묻어놔서 그래 서울 못 가서 안달이고.”
“내 맘입니다.”
“하루에 두 세시간씩 길에다가 버리면서 그래 고생할 필요가 있나. 내가 다 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놔 둬.”

성우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박 주사가 아직 젊어서 그렇지 뭐.”
“그게 젊은 거하고 뭔 상관이 있는데요.”
“서른만 넘어봐라. 하루에 두 세 시간씩 길에 버리면서 서울까지 출퇴근하는 그런 미친 짓은 천금을 준대도 싫을 걸. 저게 다 젊어서 자기 몸 귀한 줄을 몰라서 그래.”
“맞지요. 하기야 뭐, 박 주사가 힘 남아도는 거 어데 쓰겠습니까. 출퇴근할 때나 쓰지.”
“좀 전에 서울에 꿀단지 파묻어놨나 한 사람 강 사무관님 아닙니까. 묻어놓은 꿀단지가 있으니까 억지로 서울 가지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니가 파묻어놓을 꿀단지가 어데 있는데.”
“봤습니까.”
“그거를 꼭 봐야 아나.”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안댔지요.”
“길고 짧은 거는 딱 봐도 안댔제.”
“둘 다 나가.”

성우는 옆에 있던 상추를 집어 두 사람 쪽으로 내던졌다.

“이것들은 고기를 처물려놔도 지랄들이고.”
“와, 강 사무관님 적당히 하입시다. 분서장님 상 엎겠다.”
“아, 황 선배 성우 형한테 바가지 좀 작작 긁지요. 그 화풀이를 우리한테 다하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황 사무관님 같은 분이 사람 갈구믄 그게 죽을 맛이잖아요.”
“야, 니네 왜 불똥이 나한테 튀어.”
“선배 성우 형이 치대믄 좀 못 이기는 척 하고 받아주고 그러세요. 사람이 갈수록 까칠해지노.”
“너나 잘해, 너나.”

성우가 다시 상추를 집어들 자세를 잡자 다니엘은 엄살스레 고개를 움츠렸다. 그 때 아닌 소란은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말라고 민현에게 등짝을 한 대 맞고서야 끝났다.

“박 주사님 그냥 주무시고 가세요.”

지훈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지금 시간이 벌써 열 시 넘었는데 집에 가면 열두 시 넘으실 거 같은데.”
“됐다. 혹 되는 거 딱 질색이다.”
“누가 박 주사님더러 혹이래요.”
“그래. 그냥 자고 가라.”

민현은 불판에 남아있던 고기들을 걷어 앞접시에 몇 점씩 올려주었다.

“박 주사 뿐만 아니고, 니네도 그냥 자고 가라. 여기 빈 방 많다.”
“우리야 뭐 집 금방인데.”
“너도 술 먹었잖아. 명색 공무원이 술 먹고 운전하게? 니네 집까지 몇 발 되지도 않는데 대리 부르기도 애매하고.”
“...”

다니엘은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어짜꼬. 자고 가까.”
“응.”

지훈은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우진을 바라보았다.

“박 주사님도 주무시고 가세요. 엠티 왔다 생각하고.”
“엠티는 무슨, 다 늙어서.”
“여서 두 번째로 덜 늙은 게 니 아이가.”
“두 번째나 세 번째나 엠티 같은 거 다닐 나이 지난 거는 진배없다 아입니까.”
“아, 거 시끄럽네. 박 주사 그냥 자고 가라. 꿀단지한테 전화나 한 통 해주고.”
“꿀단지 같은 거 없다니까 그러네.”
“아 있는지 없는지 햄이 봤냐고요.”
“니가 파묻어놓은 꿀단지가 있었으믄 진작에 들켰겠지.”
“내가 햄인 줄 압니까.”
“내가 뭐.”
“꿀단지 제대로 꿀단지 삼기도 전부터도 소문 다 났잖아요.”
“우리집 꿀단지는 임마, 내가 꿀단지다 안 해도 딱 보믄 꿀단지다 아이가.”
“아 진짜 닭살 돋아서 못 살겠네. 지훈아, 내 갈란다.”
“에이.”
“간다고.”
“주무시고 가세요.”
“햄, 햄 꿀단지 좀 어째 해보세요.”
“자고 가라.”

다니엘은 우진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우리 꿀단지가 니보고 자고 가라 안하나.”

그렇게, 그들은 함께 있었다.






+. 이렇게까지 길게 올 줄 몰랐던 11분서의 이야기는 여기서 맺습니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 함께 해주신 모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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