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25

Final. 인간의 증명 3

너무 애를 쓸 필요는 없다고, 민현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지훈은 전에 없이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옆 분서에서 집행을 마치고 집을 뒤지던 중, 감기약에 취해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미변이자 하나를 발견했다는 리포트가 있었다. 루히만 검사 결과 그는 변이실패자는 아니고 단순한 미변이자였다. 그러나 몸살에 걸려 약을 먹고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가족이 몰살당하고 집이 불타버린 이 참담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극심한 히스테리 상태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그 사람을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민현을 졸랐다.

그런 말 아니? 내가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고.

민현은 착잡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 사람의 상처에 공조하는 건 좋은 일이야. 네게 그만큼의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상처를 보듬으려다가 네 상처까지 건드려질 수도 있어.

그래도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전에 없이 고집을 부리는 지훈을, 민현은 할 수 없다는 듯 시설로 데려가 상담실 한 군데를 잡아 주었다.

잠깐을 기다리니, 지훈과 그다지 차이가 많이 나지도 않는 청년 하나가 직원에게 안내되어 안으로 들어왔다. 줄무늬가 있는 환자복 차림을 한 그는 끊임없이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지훈까지도 덩달아 불안해질 정도였다.

막상 이 자리까지는 왔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침묵을 지키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훈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예전에, 민현이 그러했듯이.

“안녕하세요.”
“...”

그러나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경게심이 가득한 눈으로 지훈을 날카롭게 노려볼 뿐이었다.

“진료 카드를 봤는데, 형 이름이 저하고 똑같더라고요. 저도 지훈이예요. 저는 박지훈이지만요.”

진료 카드에 의하면, 상담실에 마주 앉은 사람의 이름은 손지훈이었다.

“나이는, 아마 제가 어릴 거 같아요. 열아홉 살이고요.”
“...”
“원래는 다른 선생님이랑 상담을 하셔야 하는데요.”
“...”
“형이 당한 일을, 아마도 제가 설명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제가 들어오겠다고 했어요.”

가만히 숨을 한 번 몰아쉬고, 지훈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가슴이 답답했다. 눈 앞이 울렁거렸다. 잠깐, 아주 잠깐, 머리 속이 시커멓게 지워진 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

민현이 한 말은 그런 뜻이었다.

“저는 몇 달 전까지 그냥 평범하게 고등학교 다니던 학생이었어요.”

그래도, 커다랗게 숨을 한 번 몰아쉬고 지훈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에는 엄마 아빠랑 두 살 많은 누나랑, 저까지 네 식구였고요.”
“...”
“별로 잘 사는 집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사는 게 너무 힘들만큼 못사는 집도 아니었어요. 그냥, 어디에나 있는 되게 평범한 집안이었어요. 형 집도, 아마 그랬을 것 같은데.”

그랬다. 자신의 집은, 평범하다는 말로밖에는 형용할 말을 찾기 힘든 그런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다지 화목하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서로 미워하지만도 않고,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눈 흘기고 적당히 서로 으르렁거리는, 그런. 그리고 그것은, 아마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 또한 비슷할 터였다.

“처음에는 음식이 싱거워지기 시작했어요. 간이라는 걸 하긴 하나, 싶을 만큼요. 맵고 짠 음식 몸에 안 좋으니까, 엄마가 일부러 그렇게 해서 주시나 하고 생각했어요.”
“...”
“근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
“음식이 달아지기 시작했어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그의 눈빛이 조금 변한 것을, 지훈은 느꼈다. 가만히 숨을 한 번 몰아쉬고, 지훈은 다시 고해성사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 과자, 단 빵, 단 음료수 같은 것들을 엄마가 자꾸 집에 사다 놓았어요. 식구들은 그걸 먹었고요. 점점 밥을 먹지 않고 그런 것만을 먹게 변해갔어요. 나중엔 설탕을 밥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했고.”

물어봐 줘서 고맙다, 고 다니엘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게도 이런 일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도, 아무도 안 물어보니까 말할 데가 없더라고. 그 때 그가 그랬듯, 자신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
“학교 갔다가 집에 왔더니.”
“...”
“식구들이, 머리를 쥐어뜯고 서로 할퀴고 때리면서 싸우고 있었어요. 꿀 한 병 때문에.”

지훈은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가슴이 뻐근했다. 저도 모르게 그는 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워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고요. 그 사람이 그랬어요.”
“...”
“너희 식구들은, 이제 다시는 못 볼 거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다니엘의 그 기도를 입 속으로 따라 외었다.

“제가 저희 집 문을 열어줬어요. 그리고 저희 집 식구들은, 모두.”
“...”
“총에 맞아서.”
“...”
“제가 보는 앞에서.”

처음으로, 사람이 아니라 사물처럼 지훈의 앞에 앉아있던 그는 꿈틀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는 아직 뜯지도 않은 생수를 지훈의 앞으로 조심스레 밀어주었다.

“괜찮아요?”

한참만에야, 그는 입을 열어 그렇게 물어왔다. 그 목소리는 낮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말은, 형이 저한테 하실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지훈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그래도, 시간이 조금 지났고요.”
“...”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훈은 말없이 손을 내밀어, 조금 전 자신이 꺼내 주었던 생수를 따서 입을 축였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전염병 같은 거예요.”

지훈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식구들이랑 형네 식구들은, 사람이 벌로 변하는 이상한 병에 걸린 거예요. 그래서 단 것에 그렇게 집착했던 거고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 안 되죠.”

지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요,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요.”
“...”
“현재로서는, 그 병은 치료제가 없어요. 원인도 모르고요. 왜 걸리는지도 모른대요.”

지훈은 독백하듯 말했다.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는 중이긴 한데, 언제나 개발될지는 모른다고 하고요.”

탁자 너머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텅 빈 눈빛에 가슴이 미어졌다.

나 또한, 그날 저런 눈으로 형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래서.”

지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
“사살...하는 것 밖에.”
“...”
“현재로서는 답이 없대요.”

마주 앉은 사람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지훈의 눈에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제 스스로가 뱉어낸 말의 무게에, 지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근데 왜 아무도 그런 걸 말해주지 않은 거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오기 전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 주지 않았어.”

그는 천천히 탁자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어깨가 들먹이기 시작했다. 지훈은 말없이 옆에 놓인 티슈를 서너 장 뽑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런 말을 하는 지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건 다 그냥 악몽이라고, 깨버리면 그걸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주지 못해서.”
“...”
“이게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생각해 보면, 시설에서 보낸 며칠 동안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그 말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 이건 현실이 아니라는 말. 깨버리면 그만인 꿈이라는 말.

그러나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으므로.

“그래도, 형은 살았잖아요.”

말해 봐라.
내가 니까지 죽게 놔 뒀어야 되나.

이제야 알겠다. 다니엘의 그 말은, 사실은 이런 뜻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살아 주세요.”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5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