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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23

Final. 인간의 증명 1

예전 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연구실로 찾아가면, 꼭 비커에 커피를 타서 주는 교수가 한 명 있었다. 나름 운치 있지 않냐고 그는 말했지만, 비커에 타서 마시는 커피는 커피가 아니라 색이 탁한 화학약물 같은 맛이 났다. 그래서 만성적인 수면부족으로 커피에 의지해 살고 있던 그 때에도, 그 교수가 주는 커피만은 언제나 반 잔 이상을 남겼다.

지금 마시는 커피도, 어느 정도는 그런 기분이 든다고 민현은 생각했다.

“재미있는 애길 들었는데.”

서기관은 제 잔 속에 든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치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CDC 얘기, 뭐야?”
“...”

민현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가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갔을 것인가에 대해, 그가 당장 생각할 수 있는 대답만도 대여섯 가지가 넘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이 일은 숨길 수 있는 크기의 일이 아니기는 했다.

“뭘 물어.”

민현은 툭 내뱉듯 대답했다.

“이미 다 알면서.”
“의외네.”

서기관은 미소를 지었다.

“입에 발린 말로라도 그런 거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잖아.”
“그래도 그 일을 해명하려고 노력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
“해명이 뭐가 필요해.”

민현은 커피잔을 놓고 동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아는 그게 사실인데.”

그가 가지고 있을 만한 정보제공자들은 아마도 대개가 11분서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민현의 머리 속을 스쳐갔다. 그러나 민현은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차피 디테일의 차이 같은 걸로는 상황을 바꿀 수 없을 터였으므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뭘.”
“그래. CDC가 좋긴 하지. 비교할 수 없는 예산에, 지원에, 인력 풀도 빵빵하고.”

서기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거긴 외국이잖아.”
“...”
“엄연히 한국 사람인 박지훈을, 미국까지나 데리고 가려고 할 필요가 있었어?”

그는 빈정거리듯 물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보라, 는 말도 있잖아.”
“케네디였나.”

민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 그 사람 그런 말도 하지 않았나? 국가는 시민의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라고.”
“한 입으로 두 말하는 타입이었나 보네.”
“그러게.”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그 침묵은 불안정했고, 몹시도 건조했다.

“이대휘 주사는 조만간 승진 발령을 받아서 시설로 자리를 옮길 거야.”
“이런 일에 끼었는데도 승진이라. 역시 천재는 편리하네.”
“그런 거지.”

미소를 짓는 입매가 지그시 일그러졌다.

“그러면 1분서의 상주 연구관 자리는 공석이 되겠지. 그리고 1분서 관련한 리포트들까지, 전부 네가 챙겨봐야 할 거야.”
“싸네.”
“뭐?”
“각오했던 것보다는 싸다고.”

민현은 미소를 지었다.

대휘가 시설로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대휘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을 했다. 그 곳에서, 두 사람만의 연구를 시작하기로. IMS 치료제에 대한.

그 시작은, 지훈의 혈액 400cc에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얘기 끝났으면, 가볼게.”

민현은 싸늘하게 웃었다.

“네 말마따나, 바빠질 것 같으니까.”

해답을 남에게서, 다른 곳에서, 멀리서 찾으려고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굳이 남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풀려 나갔다. 미국에서의 3년도 각오했던 터였다. 그까짓 것쯤,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민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커피 좀 바꿔. 맛 진짜 네 면상만큼 후지다.”





방역 스케줄은 집행 스케줄에 비해 훨씬 꼬이기가 쉬웠다. 돌발로 일어나는 집행 취소까지를 모두 반영해야 했고, 방역 작업 자체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던 가락이 있어, 적당히 스케줄을 맞추어 서로서로 품을 져가며 스케줄을 소화하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로 해결이 안 날만큼 특정 분서의 방역이 밀려버리면 그 때는 다 같이 모여서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

“진짜 몰라?”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어오는 것은 5분서 방역관이었다.

“뭐를요.”
“TFT에 소문 다 났는데.”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소곤거리듯 물었다.

“너네 분서에서 변이실패자 소재 알면서 말 안하고 있다고.”
“내야 모르지요.”

우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분서장님이 아는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는 모릅니다.”
“진짜야?”

우진은 조용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여서 거짓말해서 뭐하는데요.”

변이실패자의 소재를 다 알면서 말하지 않고 있는 거 아니냐는 추궁을, 우진은 이런 자리에 나올 때마다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라고 대답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방역관들은 11분서 사람들 이상으로 우진과 각별했다. 그들은 대부분이 한 번 이상 우진을 위해 자신의 품과 시간을 들여 대신 방역을 해 주었고, 우진이 업무 중 입은 부상으로 입원해 있으면 굳이 시간을 내 일부러 문병을 와서는 홍삼이니 비타민이니 하는 것을 잔뜩 쥐어주고는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들에게, 그 어떤 악의도 있지 않은 것을, 우진은 믿었다.

이 위태로운 상황이 조금이라도 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떻게 이기적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너네 분서장한테 말 잘 해서, 알면 얼른 보고하라고 그래.”

그는 큰 비밀이라도 말해주려는 듯 속삭였다.

“조만간 인사발령 있을 거라는 말이 있던데.”
“인사발령요.”
“실적 안 좋고 근무태도 불량한 사람들 인사조치할 거라는 말이 있더라구.”
“실적은 몰라도.”

우진은 피식 웃었다.

“근무태도 불량이라 하믄, 그거는 딱 우리 분서 얘기네요.”
“그러니까.”

말해 놓고 입맛이 쓴 듯,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그렇게 떨려나면, 뭐가 좋냐.”
“그거는 그렇지요.”
“그러니까, 뭐 아는 거 있으면 적당히 풀고, 편한 길로 좀 가자고 그래. 너도 이제 좀 편하게 일해야지.”
“저야 뭐.”

우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젊으나 젊은 놈이, 아직 고생 좀 더해도 괜찮습니다.”
“얘가 이렇게 뭘 모르는 소리를 해요. 야, 박 주사야. 너 지금 팔팔한 거, 그거 다 나이 먹어서 골골거리는 거 사채 땡겨 쓰는 거야. 아냐? 젊을 때 하루 밤새면 나이 먹어서 이틀을 빌빌거리게 돼.”

그는 짐짓 혀를 차더니, 우진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직 장가도 안 간 놈이.”
“장가 그거 뭐, 꼭 가야 됩니까.”
“사지육신 멀쩡한데 왜 안 가? 사귀는 아가씨 없어?”

우진은 대답 대신 웃었다.

“비밀인데요.”
“그깟 게 왜 비밀인데?”
“남자한테도 숨기고 싶은 비밀은 있는 법이다 아입니까.”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것은 우진도 몰랐다. 그 일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복잡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남이 눈물 짜는 위에 올라앉아 내 몸 하나 편하면, 그건 또 뭐가 그렇게 즐거울 일이냐고 우진은 생각했다.

“보고 싶은 사람 못 만나고 같이 있고 싶은 사람 같이 못 있어가 옆에서 눈물 짜는 거 저는 딱 질색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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