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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22

21. Bird Strike 6

다니엘은 팔을 베고 누워 품을 파고드는 지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담배 한 대 생각이 났지만 지금은 일단 참고 싶었다. 지금은 담배보다도, 매달려 오는 지훈을 다독여 주는 것이 더욱 급했으므로.

혹시나 벗은 등이 추울까, 다니엘은 흘러내린 이불 자락을 끌어 지훈의 어깨를 덮었다.

“지훈아.”

잔뜩 마른 목소리는 탁하게 갈라졌다.

“내일, 말은 내가 하께.”
“무슨 말.”
“니 못 보낸다는 말. 아니, 안 보낸다는 말.”
“그런 게 어딨어.”

지훈은 대번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형은 나 설득하려고 최선을 다했잖아. 그거 기어이 안한다고 한 건 나고.”
“지훈아.”
“왜 그런 것까지 형 혼자 다 떠안으려고 해?”

되묻는 지훈의 목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다니엘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라믄, 임마.”
“...”
“니 혼자 이거를 다 지고 갈라 했더나.”

다니엘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의 이마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니 혼자서는 안 된다. 내가 그래 안 놔둘 거고.”
“형.”
“내가 죽어도 니 보내야 되겠다 마음 먹었으믄, 보냈다. 택배 상자 아니라, 그보다 더한데 싸서라도 보냈을 거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보내겠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그는 지훈의 그 말 몇 마디에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을 터였다. 지훈의 말은 다니엘이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던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꿰뚫고 들어왔고, 다니엘은 그만 그 충격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그러니까.”
“...”
“내일 가서 말은 내가 하께.”
“싫어.”

그래도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왜 내가 내린 결정을, 형이 책임지려고 해?”
“임마.”

다니엘은 가만히 혀를 찼다.

“내가 쪽팔려서 그런다.”
“뭐가.”
“니가 그래 생각하는 동안, 나는 니 보낼 궁리밖에 안하고 있었다는 게.”

한참이나 어린 이 녀석이 이렇게나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이, 나는 어떻게든 이 녀석을 떼놓을 궁리만을 하고 있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얄팍한 핑계에 매달려.

그 사실은 두고두고 다니엘의 마음 한 구석에, 녹지 않은 설탕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그렇게 말했다.

“말이라도 내가 하께.”




회의실에서,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박 서기는 빼고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지훈은 눈을 꼭 감았다. 그래도 못내 미련이 남는 눈으로, 자기가 말하게 해달라는 듯 쳐다보는 지훈의 시선을 다니엘은 기어이 외면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우진이 문을 닫고 제 자리에 앉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다니엘은 헛기침을 몇 번 해 목을 돋우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지훈이하고 얘기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곁에 앉은 성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이는 뭐래?”

이제, 대답해야 할 시간이다. 요 며칠 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의 마음을 실컷 어지럽혀 놓고, 이제 와서 그 시간들을 다 제 손으로 뒤집어엎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 했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끝내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으므로.

“이야기는 꺼냈는데.”
“...”
“끝을 못 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민현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미국 가라고, 말을 못 꺼냈다고요. 이야기 시작은 했는데.”
“...”

회의실 안의 공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다니엘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성격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이 상황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안 되겠습니다.”

다니엘은 낮고 조용하게 말했다.

“임마 이거, 못 보내겠어요.”
“...”
“박 주사 말마따나, 미국 보낸다고 그 치료젠지 뭔지가 하루 이틀 만에 금세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겠고.”

3년은 기다리겠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3년이라는 시간은 과연 충분한 것일까. 그리고 그 3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그 녀석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새 우리한테 무슨 일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나는, 그 때까지 살아서, 그나마 더 망가지지 않은 정신으로 이 녀석을 기다릴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거는 변명인데, 지훈이 때문에, 분서장님까지 혼자 남는 것도, 사실은 마음에 걸리고요.”

그러니까, 결국 하려는 말은 이런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나 때문에, 지훈이 때문에, 우리 때문에, 힘들어 달라는.

“마 안 보낼 랍니다.”

마지막 말을 꺼낼 때 쯤에는, 가벼운 허탈함과 죄책감으로 입가에 웃음이 터졌다. 제 패를 모두 펼친 다니엘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기분으로 무슨 말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기 다 끝나셨습니까.”

그 긴 침묵을 깨고,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우진이었다.

“그라믄 저 먼저 일어납니다. 어제 보고서 덜 쓴 것도 있고.”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는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회의실 안을 울렸다. 우진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 사무관님.”

문을 막 열려다 말고,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
“잘 하셨습니다.”

우진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른이 가오가 있지, 아한테 그런 소리를 어째 하겠습니까. 맞지요.”





“진짤까.”
“뭐가?”
“다니엘.”

민현은 흐릿하게 웃었다.

“진짜 지훈이한테 말 안한 걸까.”
“왜?”
“그날 새벽에, 그런 분위기 아니었어.”

민현은 그 날 새벽의 다니엘을 떠올렸다. 여기서 내가 성우 형을 잘 지킬 테니까, 형도 거기서 지훈이를 살펴달라던 다니엘의 그 말에는 실제로 듣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절박함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니엘이, 그렇게까지 마음 먹어놓고 말을 안했을까.”
“그럼.”
“말했을 거야, 아마. 다니엘은 진심으로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으니까.”

민현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근데 그랬다가, 지훈이한테 설득당한 거겠지.”

하긴, 처음부터 그런 어른의 논리 따위가 지훈에게 통했을 리가 없다고 민현은 생각했다. 제 가족과, 제 일상과, 지금껏 살아온 제 모든 것과 바꾼 것이나 다름 없는 다니엘이었다. 그런 그를 떠나서, 3년 동안이나 머나먼 타국으로 도망치라는 게, 그 나이의 소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을까. 이 이야기는 어쩌면 처음부터 안 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

성우는 민현을 바라보았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응?”
“어쨌든 저 둘이 내린 결론이 그거라는 거잖아. 누구의 뜻이 먼저였든 간에.”
“그건 그래.”

성우는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황 선생.”
“응.”
“나 있지.”

돌아보는 시선에,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된 거 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치사한 거냐.”
“...”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민현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더 크고 급한 일에 가려져 정작 자신들의 이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다니엘은 시도라도 해 본 그 동의를 구하는 절차조차, 자신은 성우에게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 민현의 마음을 찔렀다.

“미안.”

민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혼자 그런 결정 내리고, 너한테 받아들이라고 떠밀어서.”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 성우의 대답은 담담했다.

“같이 죽기로 했잖아.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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