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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21

21. Bird Strike 5

밤 열 시 가까운 시간에야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던 다니엘은 움찔 놀랐다. 이 시간까지 집에 안 가고 뭐했냐고 가볍게 지훈을 타박하는 그에게 우진은 전에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상 외로 잠잠한 우진이 저로서도 의외였던지, 다니엘은 한참이나 우진의 자리를 노려보았다.

대충 보고서 작업을 마치고 식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오니 11시가 지나 있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내일의 출근을 위해서는 얼른 자야 했다. 그러나 지훈은 가만히 입술을 물어 씹으며 가만히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잘 거가.”

범상하게 물어오는 다니엘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훈은 결정을 내렸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언제 말할 거예요?”
“뭐를.”
“저번에 형이 그랬잖아. 박 주사님 다치셨다고 연락 받고, 집에 가다가 차 돌려서 병원 갔던 그 날.”

혼자 본청에 끌려갔다 왔던,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걱정시키는 게 싫어서, 그 대상이 되는 것도 싫어서 혼자 입을 다물고 끙끙 앓던 그 때, 다른 사람도 아닌 다니엘이 그렇게 말했었다.

이 시간 없는 와중에 비밀 같은 건 없어야 된다고.

“언제 무슨 일 생길지 모르는 게 형이 하는 일인데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데, 서로 숨기고 말 안하는 게 있으면 안 된다고.”

다니엘은 지그시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의 서두만으로, 그는 지금 지훈이 하려는 말을 어느 정도는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해 놓고.”
“...”
“왜 말 안 해줘?”

다니엘은 짐짓 고개를 돌려 지훈의 시선을 피했다.

“할라고 했다. 오늘.”
“거짓말.”
“진짜다.”

그래도 그는 지훈을 바라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니한테 거짓말해서 뭐하겠노.”

조금은 때이르게 닥친 추궁에 조금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는 커다랗게 숨을 내쉬어 자신의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1분서에 이대휘 주사라고, 니보다 나이는 어린데 니보다 직급은 높은 연구관이 있다. 아나.”
“아뇨.”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나보다도 어리다고요?”
“그래.”
“나 들어올 때도 나이 만으로 열여덟 살 넘어야 된다고 분서장님이 그러셨잖아.”
“금마는 진짜 특채다. 천재거든.”

다니엘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이 열 살에 미국에서 대학교 졸업하고, 미국 정부에서 일하던 아다. 돌연변이, 유전자 연구, 뭐 그런 쪽으로.”
“진짜 천재네.”
“말했다 아이가. 천재라고.”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금세 그 얼굴에서 사라졌다.

“황샘이.”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금마 통해서.”
“...”
“미국에 자리를 알아본 모양이다.”
“미국에, 자리를?”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라는 데가 있다. 미국 보건부 산하 기관인데.”

지훈은 지그시 다물어지는 다니엘의 입술을 불안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거기서, 니 이야기를 듣고,”
“...”
“일단 미국 오기만 하믄 뒷일은 다 책임지겠다고 했다고 하더라.”
“뒷일이라니?”
“본청 놈들 말이다.”

다니엘은 내뱉듯이 말했다.

“지금 금마들이 니를 그래 괴롭히는 이유가 뭔지 니도 대충 안다 아이가. 그런데 니가 미국 간다 하믄, 그것들이 니를 곱게 놔 주겠나.”
“그렇구나.”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가서, 치료제 개발에 협조한다. 미국 정부 기관이니까, 본청에서도 딱히 뭐라고 토를 달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훈이 한국에 없게 되면 더 이상 그 때문에 11분서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의외로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욱 분했다. 단 한 가지, 다니엘과 함께 있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근데, 그럼 형은?”

대꾸하는 지훈의 목소리는 새되게 갈라졌다.

“내 뭐.”
“형은, 어떡하는데?”
“...”
“그리고, 나는?”
“...”
“우리는, 어떻게 되는데?”
“어짜긴 뭘 어짜노.”

쨍 하고 울리는 지훈의 목소리를 따라, 다니엘의 음성도 지그시 높아졌다.

“군대 간다 생각하고, 잠깐.”
“...”
“잠깐만.”
“...”
“그러니까.”

다녀와라.

아마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다니엘은 그 말을 쉽게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이별이 별 게 아닌 게 아니라는 가장 치명적인 반증이었다.

“못하겠다.”
“뭘.”
“못하겠다고.”

결국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고개를 떨군 채, 그는 착잡한 한숨을 토해냈다. 지훈은 입술을 깨문 채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괜찮아. 해.”

지훈은 웃었다.

“어차피 안 들을 거니까.”
“임마.”
“내가 안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지훈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택배상자 같은 데 집어넣어서 미국으로 보내버리기라도 할 거야?”
“그게 무슨.”
“그럼 됐어요. 나 안 가.”

어린 목젖이 힘겹게 들먹였다.

“안 간다고.”

조금 더 단호하게, 조금 더 묵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지훈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진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가지 않겠다고.

“알아.”

힘겹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 있으면, 나 때문에 모두가 힘들겠지. 형도, 황 선생님도, 분서장님도, 박 주사님도.”
“...”
“근데 뭐, 나는 어차피.”
“...”
“살아있는 게 민폐니까.”

가장 힘든 것은, 이 부분이었다. 내가, 내 존재가, 내 생존이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나 하나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참담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것.

이 사람에게, 모두에게, 기꺼이 나로 인해 계속 힘들어달라고, 뻔뻔하게 부탁하는 것.

“이왕 민폐 끼치는 거.”
“...”
“더 끼쳐보려고.”

다니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그의 입술은 성급히 벌어졌으나,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날 좋아한다는 건 이런 거야.”

지훈은 그런 다니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 때문에 형은, 앞으로도 계속 괴로울 거고, 힘들 거고, 남들한테서 욕을 먹을 거야.”
“지훈아.”
“형.”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어 서로를 불렀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맨션, 맨션의 지하에 있던 낡은 보일러실에서, 손목을 묶이고 입이 틀어 막혀 울다가 탈진한 지훈을 발견했을 때. 자신을 대신해 목적 잃은 악의의 대상이 되어버린 지훈을 바라보던 다니엘의 기분은, 아마도. 나 때문에, 내 곁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험한 일을 당한 연인을 바라보는 기분은.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그 날 밤, 다니엘의 가슴에 박혔던 그 무딘 칼날은, 이제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지훈의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살자. 나랑 같이.”

지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기. 이 지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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