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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20

21. Bird Strike 4

그 날, 다니엘은 늦도록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니엘 뿐만 아니라 같은 집행조인 성우도 마찬가지였다. 9시가 가까워 오자 민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으니 그냥 같이 들어가자고 그가 권했지만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웬지 이대로 그냥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9시 반이 조금 지나자 우진이 돌아왔다. 지훈의 퇴근은 대개 우진이 돌아오기 전이었으므로, 이 시간에 우진을 맞닥뜨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진 또한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서다가 아직도 자리에 남아있는 지훈을 보고 흠칫 놀랐다.

“뭔데.”

우진은 대뜸 그렇게 물어왔다.

“니 아직 퇴근 안했나.”
“네.”

지훈은 어색하게 웃었다.

“형이 아직 안 들어와서요.”
“뭐?”

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흘끗 고개를 돌려 성우의 자리 쪽을 바라보았다.

“분서장님은?”
“분서장님도, 아직.”
“그라믄, 집행팀 다 안들어왔단 말이가.”
“네. 황 선생님은 기다리다가 먼저 들어가셨고요.”
“...”

우진은 자신의 자리에 앉는 대신 성우의 자리와 다니엘의 자리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뭔 일 났나.”
“...”

다른 사람도 아닌 우진의 그런 말은, 더없이 불길하게 지훈의 머리 속을 휘저었다.

정작 우진은 거기까지 말해놓고 범상하게 제 자리에 앉아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지훈은 그런 그를 끊임없이 힐끔거리며, 무언가 말을 꺼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우진은 그것으로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지훈이었다.

“주사님.”
“왜.”
“무슨 일 있는 거죠.”

다그치듯 묻는 지훈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주사님. 얘기해 주세요. 지금 무슨 일 있는 거죠.”
“...”

우진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니 너무나 다급해져, 지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우진의 팔을 잡았다.

“얘기해 주세요.”
“저기, 이거 좀 놓고.”
“저도 눈치 있어요.”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우진을 바라보는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 눈 속을 간절함과 절박함이 가득히 채웠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요즘 형 어딘가 좀 이상해진 거 저도 느꼈어요.”
“...”
“이상한데, 정말로 기분 이상했는데... 일단 기다렸어요. 형이 말해줄 거라고 믿어서요.”
“...”
“그런데요.”

억지로 입을 여는 지훈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영영 말 안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
“불안해서 죽을 것 같아요.”

우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지훈의 불안은 단순한 불안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지훈아.”

우진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지훈을 불렀다.

“야구 볼 줄 아나.”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룰만 알아요. 막 좋아하진 않고요.”
“그래, 뭐. 지금 니 데리고 야구 이야기 하자는 거 아니니까.”

우진은 말이라도 고르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두 점 뒤지고 있는 9회 2사 만루에, 타석에 타자가 들어왔는데.”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임마가 오늘 4타수 4삼진이라고, 임마를 건너뛰고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오믄, 되겠나.”
“안 되죠.”
“그런 거다.”

우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
“예?”
“아직 내 타석이 안 왔다는 말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타석 돌아오믄, 그 때 말해주께. 지금은 안 된다.”
“...”

다시 한 번, 지훈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로서 정말로 확실해졌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우진이 저렇게 말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종류의.

“주사님.”

그러나 지훈은 물러나지 않았다.

“힌트 정도는 주실 수 있잖아요.”
“...”
“지금 타석에 있는 타자 대신 다음 타자가 타석에 올라가는 건 안 되지만.”
“...”
“오늘 투수가, 무슨 공이 좋고 무슨 공이 안 좋더라고, 몸쪽 혹은 바깥쪽으로 많이 던지더라고, 그런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건 반칙도 아니잖아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훈은 다니엘을 믿었다. 그가 자신에게 해가 될 무언가를 자신 몰래 꾀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강한 확신이 지훈의 모든 의식을 사로잡았다.

“힌트.”

우진은 지훈의 말꼬리를 따라 외었다. 지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는 힌트도 뭐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말이다.”
“네.”
“어떤 남자가, 부인하고 같이 처갓집에 갔다. 억수로 더운 여름날에.”

우진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날이 40도 가까이 되는 진짜 더운 날이었는데, 장인이 간만에 쉬는 날인데 시외 나가서 밥이나 먹고 오자 하는 거라. 그러니까 장모가 뭐 당신이 그라고 싶으믄 그래 하지요 이라고, 장인 장모가 그라고 싶다 하니까 딸이랑 사위도 뭐 그래 하입시다 해가지고, 그 더운 여름에 넷이서 차를 타고 두 시간이나 차를 몰아가, 시외까지 가서 밥을 묵고 들어왔다.”
“...”
“그런데 차 타고 들어오는 길에 말이 나왔다. 장인은 간만에 쉬는 날인데 다들 집에만 있기 심심하겠다 생각해서 나가기 싫은데 밥 먹으러 나가자 한 거였고, 장모는 남편이 하는 말이니까 나가기 싫은데 나가자 한 거였고, 딸하고 사위도 나가기 싫은데 어른들이 나가자 하니까 할 수 없이 나가자 한 거였다는 말이다. 네 사람 중에, 그 더운 염천에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오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서로 눈치만 보다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짓을 하게 됐다는, 뭐 그런 얘기다. 알아듣겠나.”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 이야기가 지금의 이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거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에블린 패러독스(The Abilene Paradox)라는 거다.”
“에블린 패러독스...”
“다시 말하는데, 이거는 힌트도 뭐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말이다.”

우진은 다짐이라도 받듯 그렇게 말했다.

“지훈아, 니 햄 좋아하나.”
“...”

지훈은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나 좋아하는데.”
“많이요.”
“얼마나 많이.”
“아시잖아요. 형이랑 제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요.”

저도 모르게 얼굴로 피가 몰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얘기 영문 모르는 사람한테 하면, 저를 미친놈이라고 하겠죠. 그런데 그래도 상관없어요. 저는, 형만 있으면 돼요.”
“...”
“대답이 되셨어요?”

우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뻗어 지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절대로 니 마음에 솔직해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기는. 내가 말 안 하드나.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고.”

우진은 담담히 가라앉은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햄이 니보다 어른이고, 그래서 니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은 거는 맞다. 그런데 있제, 하나가 하나에 무조건 업혀가기 시작하믄, 그거는 그래 되믄 안 된다. 니가 햄보다 열 살 아니라 스무 살이 어려도 마찬가지다.”
“그게 무슨.”
“니가 잡아라.”

우진은 선을 긋듯, 그렇게 말했다.

“햄이 무슨 소리를 하든, 니가 햄을 잡으라고.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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