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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18

21. Bird Strike 2

다니엘은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싶은 기분조차 나지 않아 입 속에 머금었다 뱉기를 반복하면서, 다니엘은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물어 씹으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성우의 말, 민현의 말, 지훈의 말, 그리고 조금 전 들은 우진의 말까지가 머리 속에 뒤엉켜 한데 시끄럽게 울렸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끼쳤다. 성우이거나, 민현이거니 했다. 그러나 뜻밖에 곁에 와서 선 것은 우진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한심하나.”

한참만에야 다니엘은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그래, 뭐. 이해한다.”
“뭘 이해하는데요.”
“그 돌콩만한 머스마 하나를 못 지켜가, 미국으로 도망시킬 궁리나 하고 있는 게 니 눈에는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노.”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됐다. 치아라.”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한심스러우면 한심하다 해라. 니랑 내가, 그래 마음에 없는 소리나 주고 받는 사이가.”
“그러니까요. 내가 마음에 없는 소리 햄한테 해서 뭐하는데요.”

우진은 시선을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햄 뿐만 아니고요. 분서장님이랑 황 사무관님도.”
“...”
“이거 뭐, 서로가 서로를 인질 잡혀 있는 꼴이잖아요.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게 해야 된다, 그 생각 밖에 없었던 거겠지요. 세 사람 다.”
“맞나.”
“그런데요.”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일은, 지훈이가 뭐 죽을병에 걸렸거나, 이런 거하고는 좀 틀리잖아요.”
“...”
“지훈이가 어데 아픈 데가 있고, 미국 가서 치료만 받으면 나을 수 있고, 그런 거면 뭐. 남자가 돼 가지고 그까짓 3년이 대숩니까. 기다리믄 되지요. 숨만 쉬어도 가는 게 시간 아닙니까. 그럴 만한 가치 있지요.”

우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그로서는 흔치 않게 매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이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선생이 입만 벌리믄 대학 가믄 뭐든지 다 해결되니까 지금은 공부만 해라 하는 거 너무 듣기 싫어가지고, 그런 식으로 내일만 보고 오늘 무조건 희생하는 게 맞는 거냐고 한 소리 했다가 뒤지게 처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허리를 젖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거도, 뭐 그런 문제 아니겠습니까.”
“우진아.”
“그렇게 3년 참아서, 예, 다 잘 돼서 다시 만나믄, 그 때도 지금만큼 좋겠습니까.”

우진은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좋은 거를, 좋을 때, 좋은 만큼 좋아해야 안 되겠습니까.”




오늘의 보고서 작성은 여덟 시가 조금 넘어 끝났다. 다니엘은 남아 있는 성우와 민현에게 인사를 하고, 지훈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자신의 뒷모습을 따라오는 성우와 민현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는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지훈은 오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말해 주었다. 절반은 흘려 넘기고 절반은 맞장구를 치며 다니엘은 지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다니엘의 의식 절반쯤은, 아직도 우진과 이야기를 나누던 옥상 어느 구석에 붙잡혀 있었다.

“근데 형.”

하던 이야기를 그치고, 지훈은 문득 그렇게 물어왔다.

“며칠 전에 술 마신 거.”
“어.”
“누구랑 마신 거야?”

다니엘은 흘끗 눈을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게 왜 궁금하노.”
“아니 그냥.”

지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술 많이 마실 만큼 친한 친구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서.”
“뭐 그래 친한 사이는 아니다.”

다니엘은 선선히 대답했다.

“군대 갔을 때 알았던 놈인데, 어짜다가 연락이 돼서.”

별로 어렵지 않은 거짓말이었다. 혹시나 지훈이 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며칠 전부터 생각해 둔 핑계였기 때문이었다.

“니 만약에 군대 가야 되믄.”

다니엘은 불쑥 지훈에게 물었다.

“내보고 기다리라 할 거가, 기다리지 마라 할 거가.”
“...”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내가 기다리지 말라고 하면, 형 나 안 기다리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지금 이 질문이 몇 번을 에둘러 하는 이 상황에 대한 질문임을 알 리 없는 지훈은 혼자 열심히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다니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지훈의 얼굴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일단은.”

한참을 고민하던 지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검정고시를 칠 거야.”
“검정고시는 왜.”
“그래야 수능을 치지.”

지훈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수능을 쳐야 학교를 가고, 학교를 가야 군대를 미룰 수 있을 거니까.”
“미뤄서 뭐하게. 언젠가는 가야 될 건데.”
“최대한 늦게 가려구.”
“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지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나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짜잔 하고 통일돼서, 군대 안 가도 되게 바뀔 수도 있고.”
“...”
“아니면, 음, 아주 안 가지는 못하더라도, 기간이 좀 짧아질 수도 있고.”
“...”
“군대 가는 걸 대신할 만한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거기까지 말해놓고, 지훈은 짐짓 고개를 돌려 차창을 바라보았다.

“그냥.”
“...”
“형이랑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 한 마디의 파장은 길었다. 다니엘은 잠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하며, 그는 당황한 자신을 추슬렀다.

“그거는 군대 갔다 와서 해도 된다 아이가. 내가 뭐 니 군대 간 동안 고무신이라도 거꾸로 신을 거 같나.”
“그건 아닌데.”

지훈은 조그맣게 덧붙였다.

“지금은 진짜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으니까.”
“...”
“내가 좀 더 크고, 그래서 좀 어른이 되면, 그래서 하루 종일 형 생각만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크면, 그 때 가려구.”

쑥스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지훈은 말했다.

“그 때쯤 되면, 나도 아마 지금보다는 좀 덜 귀여울 거고. 형도 내가 좀 눈에 덜 밟히지 않을까?”

거기까지 말해놓고, 지훈은 아무래도 머쓱했던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는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다니엘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의 여운은 쓰디썼다.

그게, 네 대답이구나.

“좋겠다. 군대 안 가도 되고.”
“응?”

지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나 군대 안 가? 왜요?”
“TFT 다닌다 아이가.”

다니엘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한 달 정도 훈련소 가서 기초훈련 받고 근무 기간 2년만 채우믄, 그거로 병역이행처리 된다.”
“아싸.”

지훈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다니엘은 그런 지훈의 얼굴을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좋나.”
“그럼, 좋지. 형은 안 좋아? 나 군대 안 가도 된다는데.”
“좋지 왜 안 좋겠노.”

다니엘은 손을 뻗어 지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좋은 거를, 좋을 때, 좋은 만큼 좋아해야 되지 않겠느냐던 우진의 말이 빗방울 떨어지는 호수의 표면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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