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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16

20. Hello, Stranger 7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것은 11시도 지난 시간이었다.

다니엘은 침대에서 두어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냉큼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출렁, 하고 매트리스가 크게 튀었다. 지훈이 먼지 날린다며 오만 인상을 썼다. 다니엘은 짐짓 옆자리 매트리스를 손으로 툭툭 치며 지훈을 불렀다.

“일로 온나.”
“왜.”
“안 올 거가.”
“형 오늘 되게 이상하다.”

지훈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자꾸 친한 척이네.”
“친한 척이 아니고, 원래 친한 거 아이가.”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훈은 잠자코 그 곁에 누워 다니엘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그는 왼손을 들어 형광등 불빛에 반지 낀 손가락을 비춰 보았다.

“이쁘나.”
“응.”

지훈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보며 물었다.

“반지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는데.”
“감으로.”

다니엘은 허공에 들려진 지훈의 손 위로 제 손을 덮어 깍지를 꼈다.

“이 정도 감이다 하는 거가 있으니까.”
“그 정도만 가지고도 사이즈가 나와?”
“뭐 대충 알 수 있다 그러대.”

같은 손가락의 같은 위치에 끼워진 반지 두 개가 가볍게 맞부딪혔다.

“아가씨가 반지 호수가 조금 되시는 편이네요 하길래.”
“...”
“아가씨 아닌데요, 해버렸다.”
“왜 그랬어.”

지훈은 타박하듯 말했다.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그런 말 할 필요 없잖아.”
“테 얇은 반지를 자꾸 줄라고 한다 아이가.”

다니엘은 싱긋 웃었다.

“테 이래 얇은 거 별로라고 두꺼운 거로 달라고 했는데, 얇은 거를 껴야 손가락도 가늘어 보이고 예쁘다 하면서 사람 말을 안 듣더라. 그래서 마 확 질렀다.”
“...”

지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생각해 일부러 그렇게까지 말해 준 다니엘은 고마웠지만, 그 말이 나왔을 때 그 가게의 사람들이 과연 어떤 눈으로 다니엘을 쳐다봤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별 말 안 해?”
“말은 무슨 말을 하노.”

다니엘은 깍지를 낀 지훈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니 뭐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고 어쩌고 저쩌고 하던데, 그냥 반지나 사 가지고 나왔다.”

지훈은 형광등 불빛에 비친 반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굵은 바디에 작은 큐빅 장식이 단출하게 박힌, 화려하지 않은 반지였다. 자세히 보니 큐빅이 박힌 주변으로 꽃잎 같기도 하고 물결무늬 같기도 한 새김이 있었다.  

“이쁘나.”
“응.”
“뭐가 이쁘노. 수갑인데.”
“뭐, 나만 차나. 그 수갑.”

지훈은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형도 찼으니까.”





칭얼거리듯, 떼를 쓰듯 품을 파고드는 지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다니엘은 방 밖으로 나왔다.

말라버린 입술 사이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입 속으로 담배의 쓰고 맵고 아린 맛이 스며들었다. 성마르게 불을 붙이고 두어 모금을 빨았다. 언제나 그랬듯 지훈을 안은 후 피우는 담배는, 그 쓴 맛이 지훈의 맛과 섞여 더욱 미묘하게 느껴졌다. 다니엘은 방 밖으로 나온 목적도 잠시 잊은 채 차게 식은 베란다의 벽에 등을 기대고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니엘은 두 번째 담배를 피워 물고는 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성우의 목소리는 낮고 탁했다.

[어쩌고 있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혼잡니까.”
[그럼 혼자지. 둘이겠냐.]
“황 선배는 어쩌고요.”

말 끝에 다니엘은 쓰게 웃었다.

“날짜도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이젠 아주 별 걸 다 훈수를 두려고 그러네.]

두 사람은 한참을 웃었다. 성우도 다니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긴 했냐.]

힘겹게 물어오는 목소리는 착잡했다.

“아니요.”

다니엘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말 못했어요.”
[그렇지 싶더라.]

성우는 피식 웃었다.

[너 딱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거 보고 말 못했지 싶던데. 역시나.]
“지훈이가요. 눈이 디게 이쁘거든요.”

다니엘은 딴청이라도 피우듯, 그렇게 대답했다.

“스노우볼이라고, 알아요? 물 든 유리구슬 안에 조그만한 조각이나 모형 같은 거 들어있고, 반짝반짝하는 입자 같은 거 들어서, 흔들면 눈처럼 떨어지는 그런 거.”
[응. 어떤 건지 알 거 같다.]
“지훈이 눈이, 꼭 그거 같이 생겼거든요. 머스마가, 눈이 쓸데없이 이뻐요. 사람 눈이 저래 생길 수도 있구나, 싶을 만큼.”

다니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거다 대고, 차마 그런 말 못하겠대요.”
[어련하겠냐.]

담배라도 피워 무는 모양으로, 핸드폰 너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그래서 어떡하려고 그러냐. 네 말마따나 시간도 얼마 없는데.]

담배 연기를 뱉는 것인지 한숨을 쉬는 것인지 모를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감감하게 들렸다.

[정 힘들면 내가 대신 말해줄까. 아님 황 선생한테 부탁이라도.]
“무슨 그런 말이 있습니까.”

다니엘은 웃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이런 일을, 다른 사람 입으로 듣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지훈이한테 실례지요.”
[그렇긴 한데, 그렇게 입이 안 떨어져서 어떡하냐.]
“할 수 없지요. 억지로라도 해야지.”

대화는 다시 잠시 끊어졌다. 두 사람은 지금 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훈이도 지훈인데.]

성우는 중얼거렸다.

[박 주사한테 말할 일도 꿈 같다.]

본의 아니게 우진에게는 아직 이 이야기를 말해주지 못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분서가 해산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와서야 그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 다니엘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가만 안 있겠지요. 그 성질에.”
[그러니까.]

성우는 피식 웃었다.

[그 입바른 성격에, 말 꺼내는 그 순간 너나 할 거 없이 전부 개박살나겠지.]
“뭐 금마 성격에 없는 말은 안 할 거고, 날 잡아 잡수시오 하고 듣고 있어야지요.”

다니엘은 담배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가 뱉어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어깨 너머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으나 거실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사실은요.”

다니엘은 독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뭐가?]
“이 일, 결국은 지훈이가 제일 마지막에 알게 된 꼴이잖아요. 지 일인데.”
[그렇지.]

성우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뭐 어쩔 수가 없잖아. 사실 너부터도 꽤 늦게 알았고.]
“뭐 그거는 그런데, 그런 걸로 변명이 될까요.”
[안 돼도 할 수 없지.]

성우의 목소리는 내린 지 오래 된 커피처럼 씁쓸했다.

[사랑하니까, 그래서 한 짓이니까, 이해해 달라고 매달릴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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