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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14

20. Hello, Stranger 5

다니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현의 제안에 대해 응하겠다는 말도 응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제안의 무게를 아는 민현도 성우도, 그에게 차마 대답을 독촉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다니엘은 언제나처럼 지훈을 데리고 출근해 오전에는 전날 넘어온 서류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성우와 함께 집행을 나갔다. 그는 범상했고, 평온했다. 그러나 요 며칠 사이 그는 전에 없이 담배가 늘었다. 붙여 문 담배 끝의 불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눈빛이 전에 없이 감감한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우만은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버티는 사이, 끝은 다가오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바깥에서 누군가가 벨을 누르는 소리에 민현은 잠에서 깼다.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더듬어 액정을 켜 보니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도대체 이 시간에 누구일까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게 눈을 깜박거리는 사이, 초인종은 쉴 새 없이 울리다 못해 숫제 문을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더 꾸물거렸다가는 무슨 시끄러운 소리가 더 들려올지 모르겠어서, 민현은 일단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을 막 열려던 순간, 며칠 전 성우가 비슷한 시간에 불쑥 찾아왔던 것이 기억났다. 오늘도 성우일까. 문을 열었다가 민현은 그만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바깥에 서 있는 것은 다니엘이었다.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건지, 오늘 출근했던 복장 그대로였다. 명치 아래까지 늘어진 넥타이와 두어 개 풀린 셔츠 단추가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왜요.”

다니엘은 웃었다. 도대체 무슨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일까. 쳐다보는 눈자위가 붉었다. 다니엘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주가여서 농반 진반으로 그 자신도 자신의 정확한 주량을 모를 정도라고 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민현도 처음이었다.

“성우 형 아니라서 실망했습니까.”
“실망이나마나.”

민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이나 벨을 울리고 문을 걷어차는 소란을 피워댄 탓인지, 옆집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민현과 다니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개를 움츠리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민현은 휘청거리는 다니엘을 잡아끌고 일단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술을 어디서 이렇게 퍼마셨어.”

민현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혀를 찼다.

“지훈이는 어쩌고.”
“지훈이요. 집에 있지요.”

다니엘은 히죽 웃었다.

“친구 좀 만난다고 구라쳤거든요.”
“그걸 믿어?”
“당연히 믿지요. 지훈이는 착하거든요.”

엉망으로 갈라지는 그 음성이 듣기에 딱했다. 민현은 냉장고에서 찬 물 한 잔을 따라 그 앞에 놓아주었다. 목이 탔던지 다니엘은 그 물을 반 잔 가까이 단숨에 들이켰다.

“잘라나.”
“당연히 자겠지.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알기는 해?”
“몇 신데요.”
“새벽 두 시.”

그냥 그렇게 말하기에는 시간은 많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민현은 그냥 그렇게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시간도 모르고 술 마셨어?”
“예, 뭐 그래 됐네요.”

다니엘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유달리 길고 큰 손 안에 얼굴을 파묻고, 그는 한참동안이나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형.”

다니엘은 고개를 파묻은 채 민현을 불렀다. 그가 민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알고 지낸 게, 12, 3년 쯤 되나.”
“처음 봤을 때부터 따지면 그렇지.”

민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중간에 한 7, 8년 사이가 뜨긴 하지만.”
“맞지요.”

다니엘은 웃었다. 그 웃는 소리는 금이 간 유리처럼 허공 중에 흩어졌다.

“내가 있지요. 형 되게 많이 좋아해요. 알란가 모르겠는데.”
“야, 징그러. 이게 어디서 엉겨 붙어, 엉겨 붙기를.”

팔을 붙드는 손을 짐짓 장난스레 뿌리치자 다니엘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끝이 길지 못했다. 민현은 착잡한 기분으로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는 다니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형, 내는요.”

다니엘은 손등으로 달아오른 눈자위를 몇 번 비볐다. 그 안색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TFT 들어온 후로 아무 것도 욕심 안 내고 살았어요. 돈이고 사람이고. 잡히면 내 거고, 흘러 가버리면 내 거 아니고, 뭐 그래 생각하고 살았어요.”
“...”
“그러다가 이제 겨우, 내 옆에 붙잡아 놓고 싶은 게 생겼는데.”
“...”
“이래 또, 놔라 하네.”

다니엘의 붉어진 눈이 민현의 얼굴을 향했다.

“딴 사람도 아니고, 형이.”
“다니엘.”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요.”

천천히 감았다 뜨여지는 다니엘의 눈은 암막이라도 친 듯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CDC 일요. 그 이야기 꺼낸 사람이 형 아닌 다른 놈이었으믄.”
“...”
“그 새끼 내 손에 벌써 뒤졌어요.”
“...”
“곱게도 아니야. 씨발, 내가, 이제 와서 사람 하나 욕심낸 게, 그렇게 죽을죄냐고, 일단 그래 물어보고, 대답 똑바로 못하믄 숨 끊어질 때까지 밟았을 거예요.”

거기까지 말해놓고, 다니엘은 한참이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민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 씹으며 그런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근데, 왜 가만있는지 알아요?”

다니엘은 입을 다물고 한동안 민현을 넘겨다보았다.

“그 말 한 사람이 황민현이니까.”
“...”
“그리고.”
“...”
“형도, 이 일 때문에, 성우 형이랑 떨어지게 생겼으니까.”

무어라 말을 하려다, 민현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우습게도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내는 기억하거든요. 그 날 새벽에, 성우 형이 해준 얘기요. 지훈이 놔주고, 같이 죽자고 한 마디 해놓고, 목 쉬어 잠길 때까지 울었다던 말.”

무슨 말을 하고는 싶으나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모양으로, 다니엘은 한참이나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그 손끝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는 그 이야기를 믿거든요.”
“다니엘.”
“내가 딱 3년 줄게요.”

다니엘은 흐릿하게 웃었다.

“내가, 지훈이 군대 보냈다 생각하고 딱 3년만 기다릴 거니까.”
“...”
“그 안에 쇼부치고, 와요. 알았죠.”
“너.”

되묻는 민현의 목소리조차 가볍게 떨려 나왔다.

“지훈이, 보내려고? 결심한 거야?”
“그럼 어떡해요.”

착각이었을까. 다니엘의 눈자위가 조금 더 붉어진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잖아. 금마 살릴 방법이.”
“다니엘.”
“형.”

그러나 다니엘은 민현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우리 지훈이, 잘 부탁합니다.”
“...”
“금마 그거, 센 척은 독판 해도요. 어려요. 순진하고요. 쓸데없이 안 휘둘리게, 안 해도 되는 일 하게, 그래 냅두지 말고요. 형이, 금마 잘 좀. 예? 잘 좀.”
“야, 너.”
“대신에.”

다니엘은 언성을 높여,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한 민현의 입을 막아 버렸다.

“내도 여기서.”
“...”
“성우 형 잘 지킬게요.”

민현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할 말 따위는, 이제 한 마디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목구멍 안쪽을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억지로 눌러 가며, 다니엘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 밖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쓸데없는 일에 입바른 소리 못하게, 쓸데없이 위에 안 개기게, 쓸데없는 짓 해서 윗전 눈밖에 안 나게, 내가 조심시킬게요.”

거기까지 간신히 말해놓고, 다니엘은 낮은 신음을 뱉었다. 민현은 물끄러미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주섬주섬 풀어진 단추를 잠그고, 늘어진 넥타이를 추슬렀다. 그러고는 민현에게 짐짓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교사에게 인사라도 하는 학생처럼.

“우리 지훈이, 잘 살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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