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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13

20. Hello, Stranger 4

그 날의 마지막 집행은 오후 다섯 시였다. 언제나처럼 차 안에 앉아 잡담을 나누다가, 진입 20분을 남겨 놓고 성우와 다니엘은 말없이 키트를 꺼내 탄환과 총기의 작동 상태를 점검했다. 마치 몸의 일부처럼 다뤄왔던 총기여서, 몇 군데만 점검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이거 끝나고, 뭐하냐?”
“뭐하기는요. 사무실 가서 보고서 쓰고 퇴근해야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다니엘은 새삼스레 성우를 돌아보았다.

“박 서기는 황 선생더러 집에 좀 데려다주라 그러고.”

성우는 총을 만지며 다니엘의 말에 대꾸했다.

“넌 나하고 술이나 한 잔 빨러 가자.”
“술은 뭔 술입니까.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네가 언제부터 평일 주말 가려가면서 술 먹었는데.”
“아, 됐어요. 정 마시고 싶으믄 황 선배랑 마시믄 되잖아요.”
“황 선생 주량 알면서 그런 소릴 하냐?”
“아, 하기는 황 선배 공식 주량 소주 반 잔이지요.”
“요즘은 한 잔까지는 어찌어찌 먹나보던데.”
“그 양반은 주량이 문제가 아니고, 술 냄새만 맡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지는 게 문제잖아요. 가뜩이나 얼굴 허연 사람이.”

다니엘은 웃으며 혀를 찼다.

“하기야 그런 사람 데리고 술 먹을 기분은 안 나긴 하겠네요.”
“알면 콜이다?‘
“됐습니다. 지훈이도 있고.”
“임마, 집에 꿀은 너만 발라놓은 거 아니거든?”

성우는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다니엘을 바라보는 그 얼굴은 점차 착잡하게 굳어졌다.

“오늘 할 말 좀 있어서 그러니까, 시간 좀 내라.”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을 해 놓고도 성우는 소주 한 병이 다 비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을 들자마자 비워버리기를 서너 번, 성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홀짝홀짝 술만 들이켰다. 그 때마다 비어버린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다니엘은 말없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결국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다니엘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그 할 말이라는 거는, 도대체 언제 할 생각인데요.”
“...”
“형 보통 소주 한 두 병 먹으면 혀 풀리잖아요. 그래 되믄 피차 이야기하기 힘들어질 건데.”
“안다.”

성우는 무겁게 말했다.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될지 정리중이다.”
“무슨 소질도 없는 머리를 그래 굴리고 있습니까.”

다니엘은 투덜거렸다.

“그냥 1234대로 이야기하세요. 내가 대충 알아서 들으믄 되지.”
“...”

그러나 그런 말을 듣고도 성우는 한참이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국, 매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뭐. 네가 또 그렇게까지 말귀 어두운 놈은 아니니까.”

성우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너나 박 서기한테 그 어떤 유감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면 고맙겠다.”
“일단 들어나 보고요.”

술보다는 담배 생각이 났다. 그러나 요즘은 술집 안에서조차 담배를 피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조용히 혀를 차며, 성우는 몇 번을 곱씹던 말을 가까스로 밖으로 꺼내 놓았다.

“지훈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뭐를요.”
“계속 옆에 끼고 있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거다.”

성우는 무겁게 말을 이었다.

“지훈이가, 애가 똘똘해. 눈치도 빠르고. 지금 자기 관련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아마 전부 다 감추기는 힘들 거다.”
“그렇겠지요.”
“사람이 좋고 싫고 한 감정은, 그래. 좋았다가 싫어질 수도 있고, 싫었다가 다시 좋아질 수도 있는데.”

성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쳐버리면, 그건 좀 답이 없더라.”
“...”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막막한 절망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것은 누구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니엘과 지훈, 아니, 어쩌면 11분서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거듭되는 피로는 사람을 닳게 한다. 닳고 헤어져 너덜너덜해진 채, 결국은 이래도 저래도 할 수 없다는 포기와 체념으로 사람을 몰고 간다. 거기까지 추락해버린 마음은 어지간해서는 다시 되살리기가 쉽지 않다. 미워진 마음은 돌아설 수가 있어도, 고갈돼 버린 마음은 다시 채우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이 일이, 사람을 통째로 갈아 넣는 일인데. 그 와중에 니네 언제까지 서로 붙잡고 안 놓고 있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거는.”
“너도 알고 있지?”

성우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일전의 그 하프 사살 관련 서약서.”
“...”
“정말로 네가 하프를 보는 족족 사살하는 게 문제라서 받아간 게 아니라는 거.”
“모르면 나이 헛처먹었지.”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그는 술병을 들어 비어버린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성우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그런 그를 가만하 쳐다보고 있었다.

“황 선생이 몇 가지 방법을 찾아보고 있는 모양이더라.”
“황 선배가?”
“응. 처음엔 부산쪽에 계시는 은사님한테 연락을 해 봤다는데, 이 사람이 본청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확신이 안 들더래.”
“그럴 수 있지요.”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황 선배가 믿을 만한 사람이다 생각해서 연락해 본 사람이믄, 아마 줄타기하고 정치질하고 이런 쪽하고는 거리 먼 사람일 가능성이 높고요.”
“...”
“그렇다 하믄 이 일에 크게 도움 안 될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비슷한 말을 하더라. 황 선생도.”

성우는 씁쓸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 서설은 끝났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그러다가, 1분서 이대휘 주사랑 얘기가 좀 된 모양인데.”
“이대휘?”

다니엘이 잠깐 기억을 더듬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 그 천재 소년.”
“그래. 걔.”

대휘는 TFT 전체에서도 유명했다. 워낙에 어린 나이에,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달고 특채된 것에서부터 그간 낸 여러 가지 연구 성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랬다. 그러나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이루어낸 이런 저런 성과 때문에, 오히려 같은 연구관들 사이에서도 대휘를 질시하거나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민현은 그렇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 친구 통해서 미국에 연락을 해 본 모양이야.”
“미국요?”
“어. CDC라고,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라는 데가 있어.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 비슷한 덴데.”

성우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거기서, 뒷일은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무조건 데리고 오라는 말을 들었다나봐.”
“...”
“지훈이 혼자 보내는 건 위험해서 안 되고. 그 놈들을 어떻게 믿냐는 거지. 황 선생이 보호자 겸 대리인 자격으로 따라가서 아예 연구팀에 같이 들어가는 조건으로. 그렇게 되면 치료제 개발된 후에 황 선생한테도 일정 부분의 권리가 생기니까, 그걸로 우리나라 쪽에 장사는 하지 못하게 될 거고.”
“...”
“사실 그것도 그거지만, 그렇게 되면 본청이나 시설 쪽에서 지훈이 가지고 이런 저런 입대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될 거니까.”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성우는 무겁게 말했다.

“이건 너나 지훈이한테 무슨 감정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아니 뭐.”

다니엘은 고개를 저어 길어지려는 성우의 변명을 끊었다.

“형이나 황 선배가 지훈이한테 안 좋은 일을 권할 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두 번 세 번 다짐 안 해도 돼요.”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다니엘은 입을 다문 채 술잔을 들어 한잔 가득 든 술을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아닌 게 아니라 미국 정부 쪽 기관 같으믄, 본청 새끼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거기까지 어째 하지는 못하겠지요.”
“...”
“다만 그래 되믄, 내가 지훈이하고 같이 못 있게 된다 하는 거겠네요. 덤으로, 형도.”
“그건.”
“그리고 그래 되믄.”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우리 분서는, 인원 부족으로 자동 해산이겠네요.”
“그렇겠지.”

다니엘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성우 또한 그런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꽤나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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