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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11

20. Hello, Stranger 2

저 오늘 맛있는 것 좀 사 주세요 하는 말에, 우진은 묻지도 않고는 지훈을 데리고 사무실 근처의 고깃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에 삼겹살은 좀 부대끼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막상 고기 굽는 냄새를 맡고 나니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나온 고기를 다 먹을 동안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구워진 고기를 쌈에 싸서 맛있게 먹었다.

“주사님.”

소주 한 잔 생각이 나지만 일과 중에 술을 먹을 수는 없다면서 우진이 대신 주문한 콜라 한 모금을 마시고 한참을 웅얼거리다가, 지훈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쉬던 날, 영화를 하나 봤는데요.”

우진은 말없이 상추에 쌈장을 찍은 고기를 올리며 지훈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제시대 독립군? 뭐 그런 사람이 도망쳐서 민가에 숨어 있었어요.”

그런 영화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많고 많은 영화 중에 한 편 정도는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이야기였다. 꼭 제목이 뭔지, 누가 나오는 영화인지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걸 알아챈 일본 경찰이 와서 그 사람을 내놓지 않으면 하루에 한 명씩 너희 마을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고요.”
“...”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 독립군을 숨겨주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사람을 넘겨주지 않기로 했지만.”
“...”
“숨어 있는 독립군은 그 상황 자체가 너무 괴로운 거죠. 자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게요.”

우진은 말없이 지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훈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어떻게 하는 게 맞을까요.”
“그거는 경우에 따라 틀리지. 영어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

우진은 딱 잘라 그렇게 말했다.

“니 그거, 강 사무관님한테는 말했나.”
“네?”
“그래 뱅뱅 돌려서 이야기하믄, 그게 니 얘기라는 거 듣는 사람이 모를 거 같더나. 아는 아네.”

우진은 피식 웃었다. 뻔히 속이 보이는 수작을 부렸구나 싶어 뒤통수가 뜨끔해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문제가 뭔데. 니 혈청이가.”
“네.”

지훈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냥, 다들 그 일 때문에 힘드신데 저만 아무 생각 없이 속편하게 지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래. 그런 생각 할 수 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거라는 정도의 말을 듣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진은 뜻밖에 그렇게 말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 양심의 가책이라 하는 거는, 그런 거 별로 느낄 필요 없는 사람이 더 예민하게 잘 느끼더라. 니도 그렇고.”
“주사님.”
“그런 일로 니가 마음이 쓰이고 힘들다 하는 거는 니가 그만큼 때가 덜 묻었다 하는 뜻이 되는 거라서, 내는 뭐 그런 거까지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
“이 이야기를 하는 순서가 틀린 거는, 내가 별로 좋은 소리는 못해주겠다.”
“...”
“니 옆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이고, 강 사무관님 있다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할라믄 그 양반한테 먼저 하고 내한테 해야 맞지. 그래 생각 안하나.”

우진은 입을 다물고 탁자 너머 지훈을 넘겨다보았다.

“내가 말했제. 그 양반 바보 아이다. 바보인 거 같아 보여도, 보기만 그렇다. 그 양반 그래 물렁한 사람 아이다.”
“변명인데요.”

지훈은 중얼거렸다.

“형한테 말하면, 뭐라고 대답할 건지가 뻔하니까요.”
“...”
“무조건 괜찮다고 그럴 거 같아서요. 진짜로 괜찮아도, 사실은 괜찮지 않아도, 그냥 저한테는 무조건 괜찮다고 할 거 같아서.”
“그럴 수도 있지.”

우진은 순순히 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살 차 밖에 안 나는 내보고도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가지고 오만 거를 혼자 다 지고 가는 양반이니까, 니한테는 뭐 더 말할 필요도 없겠제. 거다가 니하고는, 음, 나름 좋은 사이이기도 하고 하니까 더.”
“...”
“그런데 있다 아이가. 그거는, 그 햄이 선택한 거다.”

우진은 조용하게 덧붙였다.

“뭐 둘이 사이가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됐는지 내가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햄 아무나 자기 옆에 갖다놓는 그런 사람 아이다. 그런 사람이 니를 자기 옆에 두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이런 일이 생겨도 자기가 책임진다 하는 거까지 생각하고 그렇게 결심했을 거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지훈은 조그맣게 되물었다.

“그거 하나에만 기대서, 너무 많은 걸 형한테 떠미는 거 같아서요, 저는.”
“그래서 지금 니도 이래 괴롭다 아이가.”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니가 이 일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고, 칠렐레 팔렐레 하면서 혼자 즐겁고, 행복하고, 그런 거 같으믄 니가 그 짐 햄한테 다 지우고 있는 거 맞는데, 니도 이래 괴롭고 힘들어가 내까지 붙잡고 이런 이야기 털어놓고 있다 아이가.”
“그렇지만.”
“구분을 잘 해야 된다.”

우진은 말없이 불판 위의 고기 한 점을 집어 지훈의 앞접시에 놓아 주었다.

“니 때문에 햄이 힘든 거 같다 하는 거에 대한 답은, 그거는 햄 선택이다 하는 거고. 햄은 저래 힘든데 내만 혼자 편한 거 같다 하는 거는 니도 지금 똑같이 괴롭고 있다 하는 거고.”
“...”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원래 힘들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한참 동안이나 입을 다문 지훈을 바라보다가, 우진은 그렇게 말했다.

“어짜겠노. 버텨라. 그게 니가 할 일이다.”





단순한 혈청 채취 정도가 아닌 시설 입소는 본인의 동의가 없이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날아온 공문에, 똑같은 답신을 달아 발신처로 되돌려 보내며 민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지훈을 퇴사시키고,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성우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 오히려 조직 외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다니엘만 집중적으로 감시해도 지훈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고, 조직 바깥으로 벗어나 조직 외의 사람이 된 지훈이 무슨 일을 당하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문제였다.

그 때 책상 위에 얹어둔 핸드폰이 둔하게 울렸다. 액정을 살펴본 민현의 얼굴이 대번 찌푸려졌다. 그는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민현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러게, 지난 번 시설에서의 만남 이후로 이 자식의 이름을 개새끼라든가 하는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놓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사무쳤다.

[공문 봤어.]

서기관은 친절하다 못해 상냥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언제까지 그렇게 뻗댈 생각이야?]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언제까지 그렇게 치사하게 굴 생각이야?”

민현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나 같으면 이런 짓들을 할 시간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는데.”
[눈 앞에 쉬운 길이 있는데 그걸 두고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게 참 쉽지가 않네.]

그는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좀 재고해봐 줄 수는 없어? 세상을 구하는 일이잖아.]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 그리고 적정량만큼의 혈청만 채취해 가. 그런 거라면 내가 반대할 이유 같은 거 없어. 박지훈 서기도 마찬가지고.”
[이런 전대미문의 병에 대한 항체를 갖고도 그걸 내놓기를 거부하다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진짜 말버릇 더럽구나.”

민현은 피식 웃었다.

“듣자하니 뭐, 강 사무관더러도 사람으로 되돌아갈 여지가 있는 하프를 생포하지 않고 사살하는 건 살인이나 진배없지 않냐는 식으로 까댔다던데.”
[그건 감찰과에서 한 일이지 내가 한 일이 아니라서.]
“그게 더 최악이지. 그 쪽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알고리즘을 집단무의식 수준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민현은 손에 들었던 공문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공무원이면 공무원답게, 좀 떳떳하게 일할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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