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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10

20. Hello, Stranger 1

새벽 한 시였다. 이제는 좀 자야 할 시간이었다. 민현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뜨끈하게 열이 오른 스탠드를 끄고, 그는 맥없이 천천히 침대에 드러누웠다.

요즘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어렵사리 잠이 들어도, 서너 시간을 겨우 자고 새벽 무렵 꼭 잠에서 깨었다.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다가 다시 선잠이 들고, 그나마도 아침까지 가기 전 꼭 두어번 쯤은 다시 잠에서 깨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민현은 전에 없이 업무 중에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하는 일이 잦았다. 일부러 조금 늦게 잠들면 그런 일이 없을까 생각해서 새벽까지 이런저런 것들을 살펴보다가 자리에 누워도 결과는 대개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또 몇 시에나, 잠에서 깨게 될까.

늘 켜두던 취침등마저 요즘은 수면에 방해가 되는 느낌이라 꺼 두었다. 그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누워, 민현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머리 속을 침범하는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나마 잊으려 노력하면서.

그 때 느닷없이, 바깥에서 벨이 울렸다.

술 취한 옆집 사람이 벨을 잘못 누른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벨은 두 번 세 번 울렸다. 민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민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응당, 지금 이 시간쯤 벨을 누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사람의 얼굴을 그 문 뒤에서 확인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미안.”

성우는 웃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이제야 퇴근하는 모양이었다. 그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자는 데 깨웠냐.”
“아니, 막 자려던 참이어서.”

민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그냥.”

성우는 변명하듯 말했다.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보다가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
“당신이 미친 듯이 보고 싶어서.”

민현은 피식 웃었다. 성우도 따라 웃었다. 하필이면 그 때 현관의 센서등이 꺼져, 민현은 허공을 향해 커다랗게 손을 내저어 다시 등을 켰다.

“얼굴 봤으니 됐다. 갈게.”

성우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잘 자.”
“어이, 분서장님.”

민현은 가만히 손을 뻗어 성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 놓고.”
“...”
“그냥 갈 거냐.”





담배 한 대쯤 생각이 날 법 한 데도 성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괜찮으니까 피우라고 성우에게 담배를 권한 후, 민현은 저도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는 성우의 담배 끝에 끝을 맞댔다. 불티가 옮겨 붙은 담배에서 희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퇴근이 왜 이렇게 늦어. 미안하게.”
“그냥 이것저것 보느라.”
“또 무슨 일 있는 거야?”
“좀 더 정확히는.”

성우는 입술 끝에 물린 담배 끝의 불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별 일이 없어서.”
“별 일이 없긴 왜 별 일이 없어. 다니엘 서약서 가지고 얼마전까지 말 많았잖아.”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지.”

성우는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 왜 갑자기 하프 타령일까.”
“그거야.”

뭐라고 대답을 하려다 말고 민현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잖아. 다니엘이 하프를 보는 족족 사살해 버린다는 걸 윗분들이 몰랐던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럴 때 그걸 가지고 사람을 긁어대는 게 말이야.”
“일벌백계 비슷한 그런 거 아닐까, 하고 말하면 나 순진한 건가.”
“순진까진 아니고.”

성우는 흘끗 옆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게 그나마 합리적인 설명이긴 하겠지. IMS가 뭔지 제대로 설명도 해 놓지 않은 주제에, 그 일을 하러 다니는 공무원 새끼들이 미쳐가지고 민간인에게 총질을 해서 죽였다는 말이 바깥으로 새어나가 봐. 도대체 누구 목을 잘라서 틀어막아야 사태가 해결될지 난 짐작도 안 가는데.”
“그럼.”

민현은 성우를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뭐야?”
“요즘 윗전의 관심은 딱 한 가지 뿐이야. IMS 치료제. 그리고, 그 실마리가 될 변이실패자의 혈청.”
“결국 지훈이의 혈청이 목적이다?”
“그거 외엔 없지.”
“그런데 그런 거라면, 왜 다니엘을.”
“장수를 잡으려면 그 말부터 쏘라는 말이 있잖아.”

성우는 길게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윗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잘 파악하고 있어.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우리의 약점이 뭔지.”

그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민현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당해봤잖아.”
“그러니까.”

가슴이 답답해져 민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결국은 지훈이한테 보내는 메시지다 그건가.”
“지훈이한테만 보내는 메시지는 아닐 거야.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메시지겠지.”

성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동시에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민현은 담배연기에 섞어 조심스레 한숨을 토해놓았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에게 압박이 가해지면 결국 제일 약한 고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그게 지훈이라는 건가.”
“아마도.”





“요즘 외근이 잦으신 거 같아요.”
“그러게. 시설 쪽 높으신 분들이 어찌나 연구관들의 건강에 관심이 많으신지.”

가방에 노트북과 이런저런 자료들을 챙겨 넣으며 민현은 빈정거렸다.

“사무실에 내내 앉아서 일하면 운동부족 된다고 별로 할 말도 없으면서 불러대는 꼴 좀 보라지. 교통비나 주면 말을 안 해.”
“영수증 청구하면 되지 않으세요?”
“그것도 일이잖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현은 지훈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박 서기, 부탁 좀 하자. 저기 책상에 이면지 좀 쌓아놓은 거 있는데, 그거 세단 좀 해서 버려줘.”
“네.”
“세단기 출력이 딸려서 그거 다 갈려면 시간 좀 많이 걸릴 거야. 물려놓고 쉬엄쉬엄 해. 강 사무관 애먹일 때 생각하면서 박박 찢어도 되고.”
“네.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지훈은 웃었다. 민현은 그런 지훈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가방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연구관의 특성상 민현의 자리에서는 유독 이면지가 많이 나오는 편이었다. 지훈은 민현이 내 놓은 종이들을 손 끝으로 주루룩 훑었다. 다른 분서에서 날아온 보고서들, 이메일로 받아본 외국 논문들, 이런저런 연구 결과를 정리한 수식들. 그 종이들은 대부분, 지훈으로서는 알아볼 수도 없는 수식들과 숫자들로 가득했다.

“이건.”

그 이면지 뭉치의 마지막 부분은 시설에서 온 공문들이었다. 줄잡아 스무 장 남짓 되는 그 공문들은 제각기 발신처가 달랐고 날짜가 달랐다. 그 내용은, 디테일은 조금은 달랐으나 전부 같았다. IMS 치료제 개발에 필요가 인정되니 박지훈 서기를 시설에 입소시키는데 협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민현의 대답은 한 가지였다.

[단순한 혈청 채취 정도가 아닌 시설 입소는 본인의 동의가 없이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

“...”

언젠가, 이 사태를 끝내는 데 자신이 필요하다면 가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하고 다니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는 게 맞다고. 그러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걸 따라서는 안 된다고. 스무 살도 안 되는 어린애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이 세상도 지킬 수가 없는 거라고.

그 후로는 조금은 잠잠하기에, 별 일이 없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부의 공세는 꾸준히 11분서 전체를 괴롭히고 있었다.  

“...”

어쩐지 힘이 빠져, 지훈은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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