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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09

19. Jack the Ripper 8

등을 맡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는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사람이 반으로 줄자 사용하는 탄의 양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바짝 곤두선 신경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열 스캔 데이터의 전송 속도가 느린 것에 전에 없이 짜증을 내며, 성우는 혼자 힘으로 두 군데의 집행을 해치웠다.

이 집은 오늘의 마지막 집행건이었다.

성우는 탄창을 점검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봉소 특유의 역한 단내는 아무리 맡아도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어, 집 안에 들어간 직후에는 늘 가벼운 욕지기가 치밀었다. 성우는 잠깐 숨을 멈추고 자신의 후각이 이 달갑지 않은 냄새에 둔감해지기를 기다렸다.

“스캔 데이터 요청합니다.”

다시, 변이체들이 집안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성우는 총으로 허공을 겨눈 채 스캔 데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했다. 날이 선 자신의 신경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 뚜렷이 느껴졌다. 혼자 하는 집행이 힘든 것은 실제 닥친 위험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부분 때문일 거라고 성우는 생각했다.

그 때 등 뒤로 문이 열렸다.

“뭐합니까.”

쨍 하고 울리는 채널 너머의 음성에, 성우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봉소 내에서는 무조건 전방을 주시해야 한다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

“아직 시작 안했죠.”

슬그머니 등 뒤로 와 서는 다니엘의 기척은 반가웠지만, 그만큼 당혹스럽기도 했다.

“너 임마.”

성우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혔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기는 뭐가 어떻게 돼요. 직무 정지 풀었지.”
“어떻게.”

거기까지 말해놓고 성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 설마.”
“예. 서약서 썼어요. 앞으로 저 월급 주는 양반들한테 충성할라고요.”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니엘은 귀에 낀 인이어를 가리켜 보였다. 성우는 인이어를 빼 전원을 껐다. 다니엘도 따라 전원을 껐다.

“방금 그 말 뭐냐? 진짜 아니지?”
“진짠데요.”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그래 목매달고 애원하는데, 그까짓 싸인 한 장 못해줄 게 뭐 있어요.”
“야.”
“놀래던데.”
“...”
“이래 순순히 쓸 거를, 왜 그동안 그래 뻗댔냐면서.”

다니엘은 어깨 너머로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집안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서, 그랬어요. 그러게요. 이래 써 보니 별 거 아닌데, 그간 왜 그래 피곤하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다니엘.”
“그깟 게 다 뭔데요”

이 쪽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다.

“그까짓 서류 한 장 받는다고 내를 거다 붙들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새끼들도 웃기고.”
“...”
“그까짓 서류 한 장 쓴다고 하늘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생각했던 내도 웃기고요. 뭐 언제부터 그래 준법시민이었다고.”

그제야, 조금 전 열 스캔 데이터를 요청해 놓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지금쯤이면 전송이 되었을 텐데. 그러나 성우에게는 그것보다도, 다니엘의 이야기를 더 듣는 것이 급했다. 도대체 이 놈에게 혼자 보낸 한나절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앞으로도요. 뭐 써 달라믄 다 써줄 거예요.”
“...”
“근데 그거 써놓고, 내가 안 꼴리믄 안 지킬 거예요.”
“야.”
“어차피 저 새끼들도 우리한테 한 약속 매번 안 지키잖아요.”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억울하잖아. 왜 내만 거짓말 밥 먹듯이 하는 새끼들한테 진심으로 대해야 되는데요.”
“...”
“그래서 내도 앞으로는 똑같이 해줄라고.”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행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고서를 쓰고 있는 다니엘의 책상에 ‘잘했어요’라고 쓴 쪽지 한 장을 갖다 놓았을 뿐이었다. 그 쪽지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니엘은 그 쪽지를 서랍 속에 슬쩍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지훈이 샤워를 하는 동안, 다니엘은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의외로 그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자신이 마음을 고쳐 먹었는데도 세상은 의외로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왕 이럴 거였으면, 그간 왜 그렇게 쓸데없는 날을 세우며 살아왔던 것일까 하는 때아닌 회한이 스산하게 마음으로 밀려들었다.

방 안에 팽개쳐 둔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우진이었다. 무슨 말을 할 건지, 무슨 말을 들을 건지가 눈에 선했지만 다니엘은 우선 전화를 받았다. 그에게도, 이 일의 경과를 자신이 직접 말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이제 끝났나.”
[예, 뭐. 사무관님은 퇴근하셨습니까.]
“내야 뭐 한참 전에 들왔지.”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 사이에 감감한 침묵이 흘렀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한참만에야 우진은 중얼거렸다.

[서약서 결국은 쓰셨다면서요.]
“우리 분서는 다 좋은데 안 있나.”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프라이버시가 너무 존중이 안 된다.”
[프라이버시요. 그거는 어느 나라 말인데요.]
“각자 집에 숟가락이 몇 갠지 젓가락이 몇 짝인지까지 서로 다 아는데, 니 사귀는 사람 있는가 없는가만 비밀인 거는 뭔가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 안 드나.”
[내는 어떤 분들같이 사내연애를 안 하니까 그렇지요.]

우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요새 네 사람 보믄서 맨날 그 생각합니다. 아, 저러니까 사내연애 금지하는 회사가 있구나 하고.]
“그라믄 사외연애 정도는 하고 있다는 말이가.”
[유도신문 사양합니다. 가만 보믄 햄은, 내를 너무 만만하게 봐요.]

이야기를 하던 중 담뱃불이 꺼져서, 다니엘은 핸드폰을 어깨로 받히고 불이 꺼진 담배에 다시 불을 붙여 물었다. 그 사이 우진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잘하셨어요.]

우진은 떼어놓고 그렇게 말했다.

[그까짓 서약서가 다 뭡니까. 그냥 종이쪼가리잖아요. 그거 한 장 쓴다고 뭐, 강다니엘이 배다니엘 되는 것도 아니고.]
“맞나.”
[그라고 그깟 서류 한 장 싸인해 줬다고 금마들이 앞으로 우리 분서 안 갈굴 거도 아니고요.]
“뭔 말이고.”
[앞으로 착하게 말 잘 듣겠습니다 해놓고 왔다고 진짜 말 잘 들으믄, 그게 더 웃긴 거 아니에요? 사람이 그래 안 봤는데 왜 그래 순진합니까. 진짜로 청순가련하나.]
“내 청순가련한 게 니한테까지 소문이 다 났드나. 비밀인데.”
[이 시간에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죽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니엘도 우진도 한참이나 소리를 죽여 웃었다. 어쨌든, 웃음이었다. 뒷맛이 씁쓸했지만.

[마, 됐어요. 벌써 써준 거 뭐, 잘했나 잘못했나 되씹어봐야 머리만 아프고.]

우진은 다니엘의 속을 다 꿰뚫어보듯 그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사는 거 복잡한 세상에, 사서 머리 아플 일 뭐 있습니까. 지훈이랑 뼈와 살이 타는 밤이나 보내세요.]
“그거는 니가 안 시켜도 내가 다 알아서 한다.”

다니엘은 웃으며 대꾸했다.

“니가 왜 남의 커플 연애사까지 간섭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좀 전에도 말했지요. 이래서 사내연애는 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우진은 다시 소리 내어 한참을 웃었다.

[끊습니다. 해브 어 굿나잇 하세요. 아 너무 괴롭히지 말고요.]





 +. Ruhemann's Purple 트리비아 16
11분서원들의 송편 빚기 숙련도
성우 : 하나 빚는 데 시간 매우 오래 걸림. 옆에서 뭐하냐고 타박할 정도. 결과물은 중간 정도.
민현 : 이런 거 잘할 거 같은데 의외로 잘 못함. 일단 결과물들의 모양이 일관성이 없다.
다니엘 : 일단 빨리 빚음. 네. 빨리 빚습니다.
우진 : 의외로 빨리, 예쁘게 잘 빚음. 그런데 크기가 다소 크다. 송편보다는 만두에 가깝다는 평.
지훈 : 예쁘게 잘 빚긴 하는데 시간 오래 걸림. 결과물만 갖고 보면 제일 예쁘게 만듦.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해피 추석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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