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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08

19. Jack the Ripper 7

보통 때의 11분서는 점심시간이 지나면 외근조가 자리를 비우고 민현과 지훈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공식적으로 직무 정지 공문이 내려온 다니엘까지 도합 세 명이 남아 있었다.

오늘따라 민현은 말이 없었다. 원래도 그리 수다스러운 사람은 아니긴 했다지만, 오늘의 그는 유달리 창백한 얼굴에 입을 굳게 다문 채 보고서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부지런히 자판을 치는 지훈의 손놀림은 더욱 부산스러워 보였다.

다니엘은 민현의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제 할 일에 몰두해 있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내근조의 분위기란 조용하기 마련이라고 해도, 지금의 이 정적은 분명 어딘가 경직되고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순간, 숨막힐 것 같은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민현은 흠칫 놀라 보고 있던 서류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페이지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서류가 철해져 있던 그 폴더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철이 풀려 끼워져 있던 서류가 엉망으로 흩어졌다.

“어, 놔둬.”

지훈이 전화를 받는 사이 다니엘은 민현의 책상 아래 흩어진 서류를 주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민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아무렇게나 막 주우면 순서 맞추는 게 더 큰일이야. 그냥 내가 할게.”

민현은 막 전화를 끊는 지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총무과예요. 지난주에 넘긴 공문 하나가 결재가 빠졌다고요.”

지훈은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보고 올게요.”
“그래. 일 잘 보고 와.”

자리에서 일어난 지훈이 총총히 문 뒤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다니엘은 천천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파티션 너머로 둥글게 숙인 채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줍고 있는 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한참동안 그런 민현을 바라보던 다니엘은 결국 그렇게 입을 떼었다.

“그냥 말을 해요.”
“무슨 말?”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

민현은 천천히, 수그렸던 고개를 들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본래도 희던 얼굴은 핏기가 가셔 심지어는 창백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 오늘 내내 마음 안 좋잖아요. 성우 형 혼자 집행나간 거 때문에.”

아니, 이 말은 틀렸다.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은 민현이 아닌 자신이었다. 지금 하는 이 말조차, 어쩌면 자신의 그 알량한 죄책감을 민현에게 떠밀어버리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그깟 게 뭐냐고, 어차피 그딴 서약서 쓴다고 진짜 그러고 살 것도 아닌 주제에, 그냥 모르는 척 고개 한 번 꾸벅 숙이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
“내는 지훈이 시설에 안 보낼라고 내 사람 이 지옥에서 도망시킬 기회도 버렸는데, 그 댓가가 고작 이런 거냐고.”
“...”
“그냥 그렇게, 대놓고 말하세요.”

잠시, 짙은 정적이 흘렀다. 민현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잘 아네.”

한참만에야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는 주운 서류를 책상에 부려놓고, 고개를 들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까짓 서약서 한 장 쓴다고 네 성격에 정말로 하프를 생포해다 시설에 넘길 것도 아닌데, 그깟 서류 한 장 써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

입을 다문 다니엘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민현은 피식 웃었다.

“이제 됐냐?”
“다음 말은 왜 안하는데요.”

다니엘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핵심일 건데.”
“강다니엘.”

이름을 부르는 민현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갈라졌다.

“나 지금 기분 별로 안 좋으니까, 그만 까불어.”
“선배.”
“이건, 분서장이 선택한 거야.”

민현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파티션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에 그 일이 있고, 내가 반쯤은 미쳐서 모두들 듣는데서 나 분서장 좋아한다고 말해버렸던 거 너도 기억할 거야. 후에 분서장이 그러더라. 내가 원한 건 너였지, 네 입에서 나오는 날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고.”
“...”
“나도 그래.”

민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난 분서장의 한 부분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분서장이 한 선택이 어떤 거든, 그거까지도 내 선택이야. 이 일은 분서장이 선택한 거야. 그러니까.”
“...”
“나는, 그 선택까지도 품을 거야. 분서장이 그 때 나한테 그랬듯이.”

다니엘은 책상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책상의 끝을 붙잡은 손마디가 가볍게 떨렸다. 단순히 함께 사선을 넘나드는 동료 이상의 것을 나누어 가져버린 이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까지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혼자 집행 나가는 거, 많이 위험합니다.”

다니엘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감수하겠다고요. 그게 성우 형 선택이라서.”
“지훈이도 비슷한 선택을 할 걸.”

민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니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목숨 내놓고 사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야. 그 길을 가기로 선택한 그 사람의 선택마저도 사랑한다는 그런 의미란 말이지. 아마 지훈이는 이해할 거야.”
“...”

다니엘은 커다랗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언제나 그랬듯, 뭔가를 결정하는 데는 생각보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짧은 순간, 다니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반나절 잘 놀았습니다.”

다니엘은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볼게요.”
“어디 가는데.”
“어디 가기는요.”

다니엘은 서랍을 열어 키트 박스를 챙겼다.

“이제 일하러 가야지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다니엘은 문 밖을 서성이던 지훈을 맞닥뜨렸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던 지훈은 다니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을 붉혔다.

“니 여서 뭐하노.”
“아, 뭐.”

지훈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아마도 총무과에서의 일은 한참 전에 끝났지만 안에서 오가는 심각한 대화 때문에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가는 거야?”

다니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사무실에서 죽 좀 때릴랬더마는, 그것도 성질 안 맞는 사람은 못하는 모양이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지훈은 손을 뻗어 접혀진 다니엘의 재킷 깃을 바로 펴 주었다.

“일복 많은 사람은, 노는 게 더 고역이래.”
“그 일복 많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곤 못하지.”

지훈은 웃었다. 다니엘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사무실 문 앞에서 엘리베이터까지의 길지 않은 길을 함께 걸었다.

“안 되는 거겠제.”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지훈이 묻는 듯한 눈으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황샘 말이다.”
“뭐가?”
“황샘은, 우리 때문에 자기 사람 편한 데 보낼 기회도 버렸는데.”
“...”
“내가 내 마음 하나 꺾기 싫어가, 그런 황샘 마음 아프게 하믄 안 되는 거겠제.”
“형.”
“괜찮다.”

다니엘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민법 110조에도 나온다.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무효다, 라고.”
“...”
“그까짓 서류 한 장 써준다고, 내가 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다니엘의 손 끝이 가볍게 지훈의 뺨을 만지고 지나갔다.

“니가 내를 싫어하게 되는 것도 아니겠고. 맞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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