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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07

19. Jack the Ripper 6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성우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민현에게 전화를 했다. 배고프니까 나오라는 말에, 민현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 근처, 일단 양을 많이 주는 걸로 유명한 백반집에 갔다. 성우는 넉살 좋게 ‘3인분 같은 2인분’을 주문했다. 그 때문인지 성우의 밥은 민현의 밥보다 양이 많았다. 그 밥을,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성우는 야무지게 한 그릇을 다 먹어치웠다. 민현은 밥을 먹는 틈틈이, 그런 성우를 불안한 눈으로 넘겨다 보았다.

밥을 다 먹고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밖으로 나왔다. 질리도록 단 커피를 반 가까이 다 마시도록, 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현 또한 딱히 그런 그에게 뭔가를 물어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저기, 분서장.”

한참만에야, 도저히 견디다 못한 민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 오간 건데.”
“좀만 있어봐.”

성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덜 욕먹을지 정리중이니까.”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나,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나 그게 그거야.”

민현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날 원숭이 정도의 지능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면 빨리 불어.”
“알았어. 알았다고.”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무슨 일 있었지.”
“응.”
“강 사무관 얘기?”
“응.”
“안 그래도 분서장 없을 때 오늘 강 사무관이 자수했어.”

민현은 중얼거렸다.

“직무정지 먹을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새끼 생긴 거 답잖게 눈치는 또 빨라.”
“정말이야? 직무정지 먹는다는 게?”
“그렇게 될 거 같아.”
“아니, 도대체 이유가 뭐야?”

민현은 손에 들었던 커피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언성을 높였다.

“요즘 강 사무관은 사고도 별로 안 치잖아. 며칠 전의 그 일도 강 사무관이랑은 아무 관계없고. 그런데 왜.”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부분이 하프 관련한 건이야.”
“그건 왜. 새삼스럽게.”
“알잖아. 시설에서야 늘 하프 좀 수급해 달라고 징징대니까. 그 와중에 변이실패자의 혈청을 구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고.”

성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가뜩이나 요즘 하프의 개체 수 확보가 어려워서 시설 쪽에서 볼멘소리들을 하는 모양인데.”
“강 사무관이 현장에서 사살해 버린 하프만 해도.”
“그런 거지.”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민현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고 성우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혀를 찼다.

“앞으로 현장에서 발견되는 하프를 사살하지 않고 생포하겠다는 서약을 하라고 강요한 모양인데, 이 휘어지면 죽는 줄 아는 놈이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을 리가 없고.”
“...”
“그걸 가지고 그렇게 말해버린 모양이야. 너는 사람으로 되돌아갈 여지가 있는 하프들을 죽였다. 그건, 살인이다. 즉, 너는 연쇄살인마나 크게 차이가 없다. 공권력 하에서 정당화되고 있을 뿐.”

곁에 앉은 민현이 순간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돌려지는 민현의 얼굴을 외면한 채, 성우는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집행을 빙자한 살인을 계속할 생각이냐.”
“개새끼들.”

민현이, 그로서는 흔치 않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픈 데를 찔렀네.”
“그런 거지.”
“그래서, 뭐, 그 부분을 숙이지 않으면 직무에서 빼겠다는 이야기야?”
“그런 셈이지.”

거기까지 말해놓고 성우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영악한 새끼들이야. 사람이 아픈 데가 어딘지를, 아주 정확하게 알아.”
“그거야 뭐.”
“차라리 집행 스케줄을 한두 건 더 잡아버리는 게 이 놈에게는 속편했을 거야. 이래서 자기가 직무 정지를 받아 일에서 빠지면 당분간 집행은 나 혼자 돌아야 해. 그게 이 놈에게는 그 어떤 압박보다 심할 거고.”

성우는 고개를 들었다. 다니엘을 안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시간으로도, 그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황 선생.”

성우는 곁에 앉은 민현을 불렀다.

“나는 있잖아.”
“알아.”

민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다니엘한테 그런 거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

하려던 말을 빼앗긴 성우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그렇게 물었다.

“화낼 거냐?”
“내가 그럴 자격이나 있어?”

민현은 웃었다.

“그 때, 내가 눈 딱 감고 지훈이를 포기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사랑하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그날조차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처음으로 흘렸던 그 날, 민현은 그렇게 말했었다. 나를 사랑하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기에, 너를 선택하지 못했다고.

“무슨 그런 말을 하냐.”

성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황 선생 말이 맞아. 그렇게 지훈이 넘기고 나만 이 일에서 풀려나면, 나는 속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자신 없지.”
“...”
“지금 이 일도 마찬가지지. 나는 있잖아. 하프를 사살하는 다니엘을 이해하거든.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것까진 아니지만, 그 놈이 왜 번번히 그런 선택을 하고 마는지를 이해하거든. 그래서.”

이제야, 그날의 민현이, 어떤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그걸 굳이, 꺾으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거든.”
“그만해.”

민현은 짤막하게 내뱉었다.

“무슨 말 하려는지 다 아니까.”
“황 선생.”
“이해해 달라고 하려는 거잖아.”

그 담담한 목소리가 울컥, 흔들렸다.

“강 사무관이 직무 정지되면 분서장 혼자서 집행을 나가게 될 거고.”
“...”
“거기엔 뭐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데. 그걸 혼자서 다 상대해야 될 텐데. 그렇지만, 내가 덜 위험하고 싶다고 강 사무관더러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수용하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으니까.”
“...”
“그래서, 당분간은, 꽤나 위험할 거니까, 그걸 이해해 달라는 말을 하려는 거잖아.”
“민현아.”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나는, 지금 이러다가 당장 죽어도 아무한테도 안 미안하다. 난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그 결과가 지금의 내 삶이니까. 시간을 되돌려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난 지금 이상으로 살 순 없었을 테니까.”
“...”
“근데 그 예외가 너다.”
“...”
“내가 이러다가 잘못되면.”
“...”
“나 당신한테 미안해서 지옥도 못갈 것 같다.”

민현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일부러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자위는 살짝 발갛게 달아 있었다.

“내가 저번에 그랬지. 그냥 여기서 같이 죽자고.”
“...”
“살아. 최선을 다해서 살아. 그런데, 정말로 할 수 없어서, 정말로 죽어도 안 되겠어서 죽어야겠거든, 죽어. 그래도 돼.”

민현은 시선을 떨어뜨려 성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사흘만 있다가 따라갈게.”

그 말을 끝으로, 민현은 성우의 입술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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