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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100

18. Mayday 4

뒤에 남아 일을 계속하는 성우와 민현을 남겨 두고, 다니엘과 지훈은 먼저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뿌옇게 흐린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져가고 있었다. 군데군데 켜진 가로등이 느긋하게 번져 보였다.

지훈을 조수석에 태우고 도로를 달리는 내내 다니엘은 이상하다 싶을 만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훈 또한 딱히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아, 차 안은 어색하기까지 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오늘 별 일 없었나.”

그 침묵을 깨고, 다니엘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내가 별 일 있을 게 어딨어.”

지훈은 피식 웃었다.

“다들 바쁘신데 나는 사무실 지키고 앉아서 워드나 치잖아요. 지난번 같은 그런 일 아니면 나한테 무슨 일 생길 게 어딨어.”
“말하는 거 봐라. 어른 다 됐네.”

흘끗 옆을 돌아보는 다니엘의 눈매가 아주 살짝 가늘어졌다.

“지훈아.”
“응.”
“바람이나 쐬러 갈까.”
“어디?”
“그냥. 멀리. 너무 멀리는 말고, 적당히 멀리.”




몇 개나 되는 바닷가를 지났다. 도로를 따라 서 있는 가로등 꼭대기에는 갈매기들이 날아와 앉아 있었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만지는 공기는 습하고 짰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등 뒤로 키 작은 소나무 숲이 있는 한 조용한 바닷가였다. 등 뒤로는 멀찌감치 자리한 카페의 불빛이 흐릿하게 비쳐 보였고, 알이 조금 굵다 싶은 모래가 깔린 백사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위를 담담히 파도치는 바다는, 물이 아닌 또 다른 어떤 물질 같아 보였다.

“여긴 어디야?”
“물 생각 나면 물 보러 오는 데. 여름 빼고. 여름은 사람 너무 많아서 파이다.”

백사장 한 구석에 대충 자리를 잡고 주저앉아 담배 한 대를 빼어 물며 다니엘은 대답했다.

“부산 사람은 물 보이는 데서 살아야 된다. 서울 와서, 다른 거는 몰라도 물 보고 싶을 때 물 보러 못 가는 게 그게 참 힘들었다. 그 때 수태 쏘다니다가 발견한 데다.”

부산 사람.

다니엘이 부산 혹은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은 차마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말투부터 성격에까지 죄다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지훈의 기억으로는 처음이었다.

“왜 그럴까.”
“의식 한 편에, 무슨 배경처럼 깔려 있는 거지. 바다가. 그 색깔, 소리, 냄새 이런 것들이.”
“박 주사님도 그럴까요.”
“금마도 아마 지만 아는 물 보러 가는 데 있을 거다. 부산 사람은 대부분 다 그렇다.”
“숨겨 놓은 보물 상자 같은 데구나.”
“뭐 그래 거창한 거는 아니라도, 비슷하다. 내 혼자 안 오고 누구 데리고 온 거는 니가 처음이니까.”

거기까지 말해놓고 다니엘은 말없이 담배 몇 모금을 빨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훈 또한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눈 앞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지훈아.”
“응.”
“니 오늘 뭔 일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아무 일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굳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도 말할 기분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니엘은 목소리를 깔아 지훈을 불렀다.

“3학년 2반 21번 박지훈이.”
“...”
“뭔 일이고.”
“...”

그의 입에서 불리는 그 숫자들은, 새삼 지훈을 착잡하게 했다. 지훈은 새삼 고개를 돌리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별 일 아닌데.”

지훈은 웅얼거렸다.

“오늘 황 선생님이 서점에서 논문집 하나 찾아다 달라고 심부름을 시키셨거든.”
“들었다.”
“근데 그렇잖아요. 택배로 받는 게 편하잖아. 선생님도 오늘 외근 나가셨으니까 오시는 길에 찾아오셔도 되고. 근데 나보고 굳이, 그것도 버스 타고 가서 찾아오라고 그러셨단 말이야. 심부름값까지 주시면서.”

지훈은 손을 뻗어 백사장의 모래 한 줌을 만지작거렸다. 바짝 마른 겉과는 달리, 조금 파보자 속이 축축했다.

“아마 나 바람 쐬고 오라고 그러신 거겠지.”

통밀 쿠키. 갑자기 그 쿠키 생각이 났다. 맛있었다. 맛있었는데, 맛있는 걸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민현에게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근데 거기서.”
“...”
“나 학교 다닐 때 반장을 만났어요.”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만 듣고도, 그는 대충 그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짐작한 것 같았다.

“학교엔 나 전학 간 거로 돼 있나 보더라. 고 3이 이 시기에 전학 가서 어떡하냐고 다들 걱정 많이 했대요.”
“뭐, 아마 시설에서 그래 처리했을 거다. 다들 그래 하니까.”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그래서, 금마가 뭐라 하드나.”
“아니.”

지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되게 반가워하더라.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사이 있잖아요. 서로 별로 관심 없는 그런 사이. 걔랑 나랑도 그랬거든.”
“...”
“근데 있잖아.”

지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이상했어.”
“...”
“걔랑 나랑은, 얼마 전까지 같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 듣고 같이 공부하고 그랬는데.”
“...”
“걔는 아직도 대학 어디 가냐는 걱정을 하고, 학원 빼먹었다가 엄마한테 혼나고, 그러고 살고 있는데.”

나는, 벌로 변해버린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과 싸우면서 상처받는 또 다른 사람들 사이에 내던져져서, 내가 무엇인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모른 채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할 자신은 없었다.

“나는, 음, 그러니까.”
“...”
“순식간에 너무 멀리 와버린 거 같아서.”
“...”

다니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침묵이 오히려 그의 착잡함을 더 뚜렷이 말해주고 있었다. 역시나 괜한 소리를 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그렇다고.”

지훈은 애써 웃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요. 그냥,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어.”
“...”

다니엘은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훈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마음을 쓰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을.

“맞나.”

한참만에야 그는 그렇게, 나직하게 되물었다.

“조난당했었네. 나름.”
“조난은 무슨.”
“사람은 있제. 언제 어디서나 조난당한다. 사람 미어터지는 길 한 복판에서도 조난당하고, 부모 형제 자매 다 있는 집안에서도 조난당하고. 오늘 니가 느낀 그런 거 말이다.”
“조난...”

지훈은 조용히 그 말꼬리를 따라 외었다. 순간, 반장이 가 버린 후 정류소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할 수 없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다리에 쥐라도 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던 그런 상태를.

“메이데이라는 말 아나.”
“응.”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신호 같은 거잖아.”
“그렇지.”

다니엘은 지훈을 돌아보았다.

“그거 세 번 반복해야 구조해 달라는 뜻 된다는 거는 아나.”
“진짜? 세 번이나? 그럼 두 번만 하면 구해주러 안 오는 거야?”
“뭐 그런 거는 아닌데, 공식적으로는 세 번 되풀이해야 구조 신호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이렇게.”

다니엘은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백사장에 대충 눌러 껐다.

“또 그렇게 조난을 당해서 메이데이를 세 번 불러야 되믄, 귀찮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는 팔을 뻗어, 옆에 앉은 지훈의 어깨를 끌어당겨 그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댔다.

“한 번만 불러라. 다니엘, 하고.”





+. 드디어 백회인데... 언제 끝나냐?
이 구구절절한 글 같이 달려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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