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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99

18. Mayday 3

다음에 꼭 한턱 쏘라는 말을 두 번 세 번 남기고, 반장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훈은 버스 정류장에 고스란히 앉아 멍하니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근처에 있는 학교가 파하기라도 했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몰려나왔다. 저희들끼리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며 더러는 웃고, 더러는 얼굴을 찌푸리는 그 모습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일상 그대로였다.

그 모습들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타야 하는 버스는 서너 대나 정류장을 통과해 그냥 지나가 버렸다.

“...”

슬슬 돌아가야 했다. 사무실을 너무 오래 비워 놓기도 했거니와, 혹시나 민현이 사무실에 먼저 돌아오기라도 했다면 걱정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무거운 납덩어리를 몸에 매단 것처럼, 그냥 그렇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저 쪽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새된 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 뒤를 따라 여럿이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제 자신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일상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들이 낯설어졌다.
그 순간 모든 것들이 멀어졌다.
그 순간 모든 것들이 흔들렸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사무실로 돌아온 지훈은 책을 민현의 책상 위에 가져다 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바깥에 나갔다 온 후로 지훈의 머리는 시시때때로 멍해졌다. 꾸역꾸역 워드를 치다가 저도 모를 말들을 줄줄이 써놓은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 지우기도 하고, 날짜를 바꾸려다가 원래 있던 파일을 덮어쓰기 해버려서 짜증을 내며 원래대로 되돌려 저장해 놓기도 했다. 오늘 하루는 전에 없이 잔실수가 잦았다.

그러는 사이 외근을 마친 민현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집 잘 보고 있었어?”
“네.”

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책은, 저기.”
“어, 수고. 무거웠지?”
“예, 조금.”
“조금이 아닐 텐데?”

지훈이 가져다 놓은 책의 포장지를 벗기며 민현은 중얼거렸다.

“옛날에 학교 다니던 시절에 학부에 그런 괴담이 있었어. 학점은 짠 주제에 과제는 태산같이 내주고 출석 체크 맨날맨날 하는 교수를 전공 교재로 폭행해서 죽인 다음에 피묻은 책꺼풀만 벗기고 사물함에 감쪽같이 꽂아놓는 그런 거. 이 것도 그런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겠는데. 모서리 쪽으로 잘 찍으면.”
“...”

지훈은 웃었다.

“그 책은 무슨 책인데요?”
“나도 잘 몰라.”

거기까지 말해놓고 민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토피와 아미노산의 관계, 뭐 그런 것에 관한 논문이야.”
“아토피요?”

지훈은 눈을 깜빡이며 민현을 바라보았다. 아토피라니, 민현은 왜 그런 것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 것일까. 느닷없이.

“그건 왜.”
“너는 이 말도 안 되는 병을 이겨냈으니까. 너의 어떤 부분이 이 병을 이겨냈을까, 이것저것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인 거지. 네가 아토피를 낫게 하기 위해서 먹거나 바른 것들과 IMS 간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민현은 어느새 거기까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나는 말로 내뱉은 그런 것들까지.

“그렇지만 다른 분서에서 들어오는 현장 리포트만 보시기에도 시간 모자라시잖아요.”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안 할 수는 없잖아.”

민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본청에서든 시설에서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널 끌고 가려고 할 거야. 가만히 있으면 그걸 막을 수가 없어. 내가 뭐라도 하고 있어야 돼. 물론 그것조차도 생까려면 생까겠지만, 최소한 이런 걸 하고 있다고 내세울 뭔가가 있어야지.”
“...”

지훈은 고개를 수그렸다.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 하나를 지키기 위해 이 사람들이 이렇게나 열심인 동안, 자신은 멀어져 버린 일상 따위에 넋을 놓고 오늘 오후 내내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아 참. 그 쿠키는 먹어봤어?”
“네? 아.”

그제야 지훈은 민현이 말해 준 그 집의 쿠키를 사오기만 했을 뿐 먹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깜빡했어요. 사오긴 했는데.”
“왜, 별로 입에 안 맞아?”
“아니요. 사 와 놓고 먹어보는 걸 깜빡 했어요.”

지훈은 쿠키를 꺼냈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비닐 포장에 베이지색 리본이 묶여 있는 봉투를 뜯어 민현에게 반을 가져다주고는 서둘러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속으로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퍼졌다. 군데군데 박혀 있는 아몬드도 맛있었다.

“어때? 괜찮아?”
“네, 맛있어요.”
“속 부대끼거나 하진 않구?”
“네.”

이로서,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인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집행팀의 귀가는 7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아주 늦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주 빠르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전화가 걸려와 성우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민현은 다니엘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1층 로비로 내려왔다. 민현은 일단 무조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해 한 잔을 다니엘에게 쥐어주었다. 다니엘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 커피를 받았다.

“이거는 뭔데요. 성우 형은 어쩌고 내만.”
“응, 뇌물.”
“뇌물요?”
“제 발 저려서.”

민현은 커피 한 모금을 빨아 마시고는 지그시 콧잔등을 찌푸렸다.

“오늘 지훈이, 좀 이상하네.”
“지훈이가요?.”
“오늘 심부름을 좀 보냈었거든.”

민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논문 구해주는 서점 알지. 너도 몇 번 갔다 온 적 있잖아.”
“아, 거기요. 알지요.”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보냈어요?”
“응. 사무실이랑 집만 오락가락 하고 있잖아. 그래서 바람 좀 쐬라고 보냈는데, 거기 갔다 온 후로 애가 내내 시무룩해.”
“...”
“거기다가, 좀 전에는.”

민현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보고서 올라온 걸 슬쩍 봤는데, 거기 이름 쓰는 칸에다가 3학년 2반 21번 박지훈 이라고 써놨더라구.”
“....”
“내가 살짝 고쳐놓긴 했는데 나갔다 뭔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싶고.”
“...”
“또 대놓고 물어보려니까 무슨 스토커 같고.”
“그랬겠네요.”

다니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물어볼게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영 마음이 안 좋아.”

민현은 혀를 찼다.

“그냥 놔둘 걸, 괜한 걸 시켜서 저러나 싶고. 안 그래도 불안정한 애를.”
“불안정해도, 어떡해요. 평생 어디 유리관 같은 데 안에 들어가서 살 수도 없고요.”

다니엘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마음은 아프지만, 누가 대신 겪어줄 수 없는 일이라는 거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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