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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98

18. Mayday 2

그들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서른 명 남짓한 같은 반 안에서도, 소위 ‘SKY' 진학을 목표로 하는 반장과 뭐든지 적당히 그만그만한 지훈은 그 처지가 많이 달랐다. 고 3이 되어 같은 반이 되고 여름이 지나서까지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지만 지훈에게는 그에 대한 인상이 그다지 뚜렷하게 남아있지는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데 특히 수학을 잘하는 아이’ 정도의 인상만이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너 전학가지 않았어?”


그는 전에 없이 지훈에게 관심을 보이며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전학 간대서, 다들 이 시기에 전학 가면 어떡하냐고 걱정 많이 했는데.”


전학 간 것으로, 처리되었구나.


시설로 옮겨진 후 며칠 간, 우습게도 지훈은 그런 것을 고민했었다. 학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단결석으로 처리되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다니엘에게서, 학교 같은 건 적당히 처리되었을 테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직시하기에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자신의 신경이 일종의 도피처로 학교 문제 같은 사소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선택한 결과였던 것 같았다.


“아 뭐.”


지훈은 어색하게 웃었다.


“전학 아냐. 자퇴했어. 난 대학교 안 갈 거라서.”

“자퇴?”

“응. 아마 다른 애들 신경 쓰이게 할까봐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나보다.”

“왜?”


저 ‘왜’는, 왜 자퇴했냐는 말일까 아니면 왜 대학을 가지 않느냐는 말일까.


“너 인서울 정도 할 성적은 되지 않았어?”

“그 정도는 아니었지.”


인서울.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세 글자는 지훈의 인생에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대학을 안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지방으로 가기는 싫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집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그것만 가능해진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일상의 불과 한 발 앞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등록금도 너무 비싸고 인서울 못해서 지방 가야 되면 그것도 돈 들고. 그렇게 학교 다니고 졸업한다고 취업 무조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고민에 빠져 살던 시간이, 불과 얼마 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학교 관두고 취업했어.”

“취업? 알바?”

“아니. 정직원.”

“쩐다.”


반장은 눈을 빛내며 지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하는 회산데. 대기업이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고졸이 대기업까지는 좀 어렵나?”

“야, 난 졸업도 못하고 관뒀으니까 고졸도 아니지.”

“그럼, 중소기업? 아님 벤쳐?”


지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공기업 비슷한 거.”

“아 씨 완전 쩔잖아. 한턱 쏴라.”


생각만으로도 신이 나는지 반장은 숫제 앉은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즐거워했다. 늘 무뚝뚝한 얼굴에 공부만 하는 아이라는 인상이 강해서, 그에게서 이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월급은 얼마나 받아?”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많이는 못 받아. 백만 원 조금 넘어.”

“그래도 정직이라는 거잖아? 4대 보험 돼?”

“그런 거 같아.”

“이야.”


반장은 지훈의 어깨를 좀 과하다 싶을 만큼 한 대 툭 쳤다.


“성공한 인생이네. 난 서울대 수시 붙은 애들보다 네가 더 부럽다.”

“...”


부럽다. 그 단순한 말이 가슴 한 구석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내게 일어난 일을, 내가 보고 들은 일들을 모두 듣고도, 너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근데 부모님은 그냥 학교 관두고 취직한다니까 별 말씀 안하셔? 하긴 공기업씩이나 되니까 좋아하셨으려나.”

“...”

“거기 어딘데? 자리 좀 있냐? 나도 학교 관두고 공기업 취직한다고 말이나 꺼내볼까.”

“야, 너는.”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지훈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차피 공부도 잘 하잖아. 좋은 학교 가서 더 좋은 데 취직하면 되지.”

“그게 쉽냐.”


한껏 화사하게 피었던 그의 얼굴은 지훈의 말 한 마디에 다시 어둡게 수그러들었다.


“나 이번 모의고사 죽 쒀서, 지금 돌아가며 터지는 중이다. 엄마 아빠 담임 학원 샘한테까지. 지금도 학원가야 되는데 죽기보다 가기 싫어서 미기적대다가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이 있길래 와본 거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버스 정류장 처마 끝에 맺히는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사는 게 왜 이러냐, 진짜. 나이 몇 살 먹지도 않았는데.”

“...”


분명, 자신도 했던 말이었다. 어리다고 해서,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해서 할 수 없는 말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어처구니없는 곳으로 밀려나오고 보니, 그 쓰라린 일상이 너무나 그리워 목이 메었다.


그 순간들은, 이젠 그에게서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럼 지금도 회사 있다가 나오는 거야?”

“응. 상사님 심부름.”

“멋있다.”

“멋있기는. 그냥 심부름인데.”

“그래도.”


그 순간, 반장은 주머니를 뒤쳐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알아본 그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스쳤다.


“엄마네.”

“어머니셔?”

“학원에서 엄마한테 전화했나보다. 안 왔다고.”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 그러나 그는 쉽게 전화를 받지 못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며, 그는 핸드폰을 쥐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지훈은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줘 봐.”

“어쩌게.”

“줘 봐.”


지훈은 반장의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헛기침을 해서 목을 몇 번 돋운 후, 그는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받았다.


“행정안전부 5급 사무관 박지훈입니다.”

“...”


곁에 섰던 반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그를 향해 쉿 하는 폼으로 입술 앞에 손가락을 하나 대 보이고, 지훈은 다시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지훈은 분서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와 말투를 떠올렸다. 성우의 서늘함, 민현의 조곤조곤함, 다니엘의 매서움, 우진의 똑부러짐까지.


“네, 어머님. 제가 은사님한테 후배 대입 관련해서 수상 경력 같은 걸 좀 챙겨줄 수 있겠느냐는 말을 들어서요. 마침 저희 기관에서 유사한 공모전을 하나 진행 중이어서요.”


전화기 너머의 가시 돋친 목소리는 대번에 누그러졌다. 아 그럼, 지금 저희 애랑 같이 계시는 건가요? 하고 묻는 목소리는 정답기까지 했다.


“네. 제가 지금밖에 시간이 안 돼서. 아, 학원 시간이었군요.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바쁘신 중에 저희 애 챙겨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가 돌아왔다.


“예. 그럼 들여보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그렇게, 불과 1, 2분 만에 지훈은 무사히 전화통화를 마쳤다. 반장은 무엇엔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자신에게 핸드폰을 되돌려주는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 씨발. 박지훈 너 진짜 쩐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훈은 따라 웃는 것조차 잊고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거야?”

“뭘.”

“방금 그거.”

“그냥 우리 사무실 상사님들 코스프레 좀 한 거야.”

“진짜 개쩐다. 우리 엄마 진짜 눈치 빠른데.”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한동안 몸을 앞으로 숙이며 키득거리는 그를, 지훈은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반장.”

“응.”

“그래도 있잖아.”


그렇게나 빨리 끝나버릴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나 덧없이 사라져 버릴 줄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그 시절의 모든 것들에게

조금은 더 상냥했을 것이다.


“엄마한테 잘해.”


우리, 엄마.

그 말이 그렇게나 입 밖에 내기 힘든 말이 될 줄 알았더라면 미리 많이 불러볼 걸 그랬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나중에, 다 후회한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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