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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97

18. Mayday 1

주말동안 지훈에게 일어난 일을, 분서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딱히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공식적으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성우와 우진이었고, 이 일에 직접적으로 입을 대지 않은 민현이라고 딱히 이 일에 관해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주말에 뭔 일 있었다면서. 대충 얘기는 들었어.”


출근 후 이런 저런 기본적인 업무를 마치고 집행 스케줄을 살피는 다니엘을 밖으로 불러낸 민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대뜸 그렇게 물었다.


“지훈이 상태는 좀 어떤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요.”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거보다 더한 일도 겪었는데 이라면서 피식 웃고 마는데.”

“...”

“진짜로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토요일 밤 늦게야 겨우 다니엘에게 업혀 집으로 돌아온 지훈은 일요일 해가 질 무렵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계속 잠만 잤다. 어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자고 있는 인중에 손 끝을 살짝 대고 호흡의 징후를 살핀 순간이 두어번 쯤 있었다. 그렇게 며칠 밤이라도 샌 것처럼 자고 일어난 지훈은, 대뜸 배가 고프니 라면 끓여먹자며 여상스레 웃었다. 파와 계란에 고춧가루까지 듬뿍 풀어 끓인 라면에 찬밥까지 야무지게 말아 한 그릇을 비우고는, 걱정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다니엘을 향해 난 이것보다 더 험한 일도 겪은 사람이라며 제 가슴을 툭 쳐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허세 아닌 허세를 과연 어디까지 믿어도 좋은 것인지, 다니엘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어지간하믄 집에서 쉬라고 할라 했는데. 그렇잖아요. 행정 업무야 월말만 아니믄 하루 정도 밀린다고 누가 크게 피 보는 사람도 없고요.”

“그렇지.”

“그런데 아를 빈 집에 혼자 놔둘라니까.”


자신의 집에 살게 된 첫 날, 퇴근해 돌아와서 발견한 것은 세탁기와 벽 사이의 좁은 틈에 처박혀 반쯤 정신을 놓은 지훈이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것도 그래. 예전에 그런 일도 있었고.”


민현은 안쓰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그런 일을 겪고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잖아. 거기다 더 나쁜 건, 지훈이한테 심리적으로 타격을 줄만한 일이 끊임없이 생기는데 그걸 풀고 갈 시간적인 여유 자체가 안 생긴다는 거야.”

“...”

“근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 거 알지.”

“저야 뭐.”

“너도 지금 여기 시한폭탄 하나 껴안고 있는 거야. 모르진 않지?”


민현은 손 끝으로 다니엘의 명치 언저리를 쿡쿡 찔렀다.


“두 사람 다 빨리 뭐든 시작하는 게 좋아. 미루고 덮어둔다고 낫는 병 같은 거 아니니까.”






언제나 그렇듯,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집행팀이 먼저 자리를 비웠다. 점심을 먹고 들어오니 우진도 나가고 없었다. 대부분의 날들이 그러하듯 사무실 안에는 지훈과 민현 두 사람만이 남았다.


“나가세요?”

“응. 오늘도 외근.”


오늘은 민현도 외근할 스케줄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방에 충전이 끝난 노트북을 챙기며, 민현은 지나가는 이야기라도 하듯 조용하게 덧붙였다.


“주말에 있었던 일, 이야기 들었어.”

“...”


지훈은 멈칫거렸다. 뭐라고 대답할 말을 고르는 사이, 민현은 무덤덤하게 제 할 말을 계속했다.


“다니엘은 아마도 널 빈집에 혼자 있게 하기가 마음 쓰여서 굳이 같이 출근한 모양이야. 나도 그게 딱히 나쁜 생각이라고는 생각 안 해. 혼자 아무도 없는 빈집에 처박혀서 벽만 쳐다보는 것보다야 나와서 사람들하고 부대끼는 게 훨씬 나으니까.”

“네.”

“그런데, 본청 문제가 되면 좀 이야기가 달라.”


민현은 가방을 챙기던 손을 멈추고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난 번 그 일이 그렇게 마무리가 됐지만, 그 정도로 물러날 사람들은 아니야. 이미 한 번 겪어본 적이 있겠지만 또 지난번처럼 사무실 빈 틈을 타서 소환장 하나 들고 쳐들어와서 같이 가자고 할 수도 있어.”

“...”

“그럴 때는.”


민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짤막하게 내뱉었다.


“괜히 쓸데없이 언성 높이지 말고 분서장을 팔아.”

“네?”

“분서장이 시킨 급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리 떠날 수가 없다, 정 급하면 분서장한테 연락해서 나 데리고 가도 되는지 허락을 받으라고 말하면 돼. 그게 가장 무난한 방법이야.”

“저기, 그렇지만.”

“소환장은 구속영장이 아냐.”


민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뭔가를 잘못해서, 비리를 저지르거나 범죄에 연루돼서 감찰 같은 걸 받을 일이 생긴 게 아니라면, 그 소환장은 우리가 너한테 볼일이 좀 있으니 웬만하면 좀 오라는 정도의 효력밖에 없어. 네가 바빠서 못 간다고 하면, 그걸 가지고 널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거야.”

“...”


지훈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저번에도.”

“사실 순순히 따라가 줄 필요가 없었지.”


민현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래서 다들 본청 사람들 욕하는 거야. 그런 걸 아는 사람이 없는 틈에 쳐들어와서 널 끌고 갔으니까.”

“...”


지훈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지난번 그 일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을 따라갔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분위기는 그 조사관이라는 사람을 따라가지 않으면 뭔가 큰 일이 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왜 자신을 제외한 분서 사람들이 본청 사람들을 그렇게 못마땅해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 그리고 심부름 하나 부탁할게.”


민현은 지훈에게 메모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흰 메모지 위에는 민현의 글씨체로 주소와 상호 한 군데가 적혀 있었다.


“여기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20분 정도 가면 원서 전문 서점이 하나 있어. 거기 내가 부탁해 놓은 논문집이 하나 있는데, 그것 좀 찾아다 갖다 주면 고맙겠고.”

“네.”

“택시를 타도 돈이 많이는 안 나올 거지만 웬만하면 버스 타는 걸 추천해. 가끔은 버스나 지하철 같은 걸 타고 어딘가로 가면서, 사람들 사는 걸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아지기도 하니까.”

“...”


그러니까 선생님은, 일부러 나더러 이 책을 찾으러 가라는 거구나.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택배로 받는 방법도 있고, 자신이 외근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찾아오는 방법도 있을 텐데도. 집과 사무실만 오락가락하고 있는 자신을 위해서. 일부러.


“그리고 이건, 심부름값.”


민현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지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서점이랑 같은 건물 2층에 무설탕 쿠키 파는 유명한 가게가 있는데, 그 집 통밀 쿠키가 정말 맛있어. 한 봉지 사 먹어 봐. 민트 아이스크림이 괜찮은 정도면, 그것도 먹을만 할 거야.”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것은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미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주인에게 민현의 이름을 대니, 누르스름한 종이에 잘 포장된 두꺼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커버가 두껍고 단단한 데다 두께마저 두꺼워 한 손으로는 오래 들고 있기도 힘든 그 책을 들고 지훈은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 버스 한 대가 도착해 정류장에 서는 것을 보았지만 굳이 뛰기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던 모양인지, 다음 버스는 배차 시간을 한참 넘기고서도 오지 않았다.


월요일 오후 시간의 정류소는 한산했다. 지훈은 정류소 의자에 앉아 차선 너머를 쳐다보며 멍하니 눈을 껌벅거렸다. 조용하다 못해 평화로운 거리의 풍경은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자신 또한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상 속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 박지훈?”


그 때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지훈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반장.”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지훈이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던 시절, 지훈의 반 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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