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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94

17. A Little Less Conversation 5

남자는 웃었다. 어딘가 허탈한 듯한, 속이 텅 빈 웃음소리였다. 다니엘은 입을 다문 채, 자신에게서 몇 발 떨어진 곳에 비틀거리고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수태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범상한 얼굴이었다. 어깨를 꽤나 세게 부딪히고도 그날 밤 쯤에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을 것 같은.


그날의 불행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마치 날벼락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는 좀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

“이 일은 어차피 당신하고 내 문제다. 금마는 이 일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고.”

“...”

“그라고, 애초부터 당신 목표는 내 아니었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남자의 목소리가 뒤틀렸다.


“작작해 둬. 어지간히나 사람 목숨 생각하는 척 하는 거, 슬슬 역겨워지려고 하는 참이니까.”

“얼마 전에, 9분서 집행관 한 명 피살된 거.”


다니엘은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그것도 당신 소행이가.”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어. 나는 그저,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를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었어.”

“...”

“XX 맨션이라는 말을 듣더니, 그 사람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랗게 질리더군. 그래서 뭔가 있다는 걸 알았어. 혹시 거기서 만삭의 임산부를 본 적이 없느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먼저 꺼지라고 고함을 지르더니 칼을 꺼내들었어. 그걸 피하려다가 몸싸움이 일어났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칼에 찔려 쓰러져 있었어.”

“...”

“당신들, 공무원 아니야?”


그는 물었다.


“무슨 공무원이, 칼이니 총이니 하는 흉기를 가지고 다녀?”

“...”


다니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픈 데를 찔린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맨션에 집행을 나갔던 집행관 거의 전원이 PTSD로 반 년 이상 심리치료를 받았다. 그 시절의 사람들과 서먹해 진 것에는 그 일에서 본의 아니게 빠진 자신에게 쏟아지는 원망을 견디지 못한 때문도 있었다.


그 집행관 또한 XX 맨션에 집행을 나갔던 사람이었다, 그 또한 그곳에서 지옥을 목도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죄를 억지로 외면하고 살아가는 와중에, 그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맞닥뜨리게 된 그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옥은 어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좀 놀라고 있는 중이야.”


그는 빈정대듯 말했다.


“여기 오자마자 칼이든 총이든 빼들고 죽이겠다고 설칠 줄 알았는데.”

“당신이 내한테 바라는 게 뭔지, 내는 잘 모르겠다.”


다니엘은 담담하게 말했다.


“잘못했다고 빌라면 빌 수도 있고, 무릎 꿇으라면 꿇을 수도 있다. 그런데.”

“...”

“목숨 내놓으라는 말은, 못 들어준다.”


남자는 다니엘의 귀에까지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뻔뻔하군.”

“안다. 그런데 할 수 없다.”


다니엘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는, 금마한테서 가족을 뺏었고, 내가 그 가족 대신이 돼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

“죽어도 금마보다 먼저는 못 죽는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해해라.”


다니엘은 품 속에서 총을 꺼냈다. 이 총으로 변이체도 하프도 아닌 ‘사람’을 겨눈 것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제 드디어 본색이 나오는 건가.”


그는 웃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웃지 않았다.


“아니. 부탁하는 거다. 애원하는 거고.”

“...”

“제발 이쯤에서, 그냥 돌아가 달라고.”

“애원을 굉장히 신사적으로 하시네.”


남자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니엘 또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말없이 대치했다.


“한 가지 묻지.”


남자의 목소리는 잔뜩 짓눌려 있었다.


“왜 변명 안 해?”

“변명?”

“아까 학생하고 이야기를 좀 했어. 그 학생은, 당신은 이 맨션에 온 적이 없다더군. 원래는 가기로 돼 있었지만, 그 전날인가 다치는 바람에 못 갔다고. 그래서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

“물론, 난 그 말을 다 믿진 않아.”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 말을 안 하지?”

“이러나저러나, 똑같을 거니까.”

“똑같다?”

“금마 말대로, 나는 그때, 운이 좋아서, 이 맨션에 안 왔다. 여기서 죽은 사람이 당신하고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내하고 직접 관계가 없는 일은 맞다.”


다니엘은 흔들리지 않고 총을 겨눈 채,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다고.”


그렇다고


“내한테 아무 죄가 없느냐 하면.”


내가 지은 죄가, 내 손에 묻힌 피가 사라지느냐 하면


“내는 그렇게 말 못하니까.”


그런 것은 아니니까.


“당장 당신이 붙잡고 있는 금마 식구들, 다 내가 내 손으로 죽였다. 그 외에도 많이. 정말로 많이. 날마다. 얼마나 더 죽여야 될지, 그것도 모른다.”

“...”

“그런 주제에, 이 맨션에 온 적이 없다는 거만 가지고, 내는 아무 잘못도 안했다 하는 거짓말은, 내는 못하니까.”

“...”


남자는 넋을 놓은 듯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조금 더 독한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훨씬 더 상대하기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훈을 데려다가 최면을 하고, 혈청을 강제로 뽑아 이런 저런 실험을 하려고 했던 자들만큼의 뚜렷한 악의만큼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이 곳에 오자마자 심장이든 두개골이든 경동맥이든 단 한 발로 그 목숨을 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딱하게도, 지훈을 여기까지 끌고 온 이 자는 어설프기 이를 데 없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러나 차마 상관도 없는 남의 목숨을 서슴없이 해할 만큼 독하지도 못한, 그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여기까지 내몰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그런 짓들을 하는 거지?”

“방법을 모르니까.”


다니엘의 목소리는 흔들렸다.


“사람이 알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 방법을 모르니까.”

“...”

“병이 돌고 있다.”


다니엘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생겼는지, 왜 걸리는지,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 하나도 밝혀지지 않은, 그런 병이다. 그 병에 걸리믄, 사람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

“이 맨션 사람들은 그 병에 걸렸고.”

“...”

“그래서.”

“그럼.”


되묻는 남자의 목소리는 어린애처럼 투명해졌다.


“우리 애 엄마도?”

“아마도.”


다니엘은 눈을 감았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 맨션 사람들 중에는 IMS에 전이된 사람 따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거기까지 말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물론 어쩌면 이것조차도, 공범자로서의 회피 반응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마도, 그래서.”

“그런 거라면.”

“...”

“왜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지 않은 거지?”

“...”

“그런 거라면, 그런 거였다면.”

“...”

“누구를 미워할 필요도 없이, 그냥 슬퍼하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언젠가 이 일이 왜 비밀이냐고 묻던 지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미리 알기만 했으면 최소한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정도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묻던 그 목소리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전히 사내에게 총을 겨눈 다니엘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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