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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92

17. A Little Less Conversation 3

다니엘은 침묵했다. 몇 달간, 그의 머리속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자잘한 조각들이 차례차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순직한 9분서의 그 집행관도 그 사건 당시 집행에 들어간 분서에 속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결국은 그런 것이다. TFT에서 집행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찰 혹은 군인 출신이다. 그런 사람에게, 미전이자가 어떻게 사망으로 이어질 정도의 자상을 입힐 수 있을까를 의아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답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범인이, 그에게 찰나의 머뭇거림을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


[햄.]


핸드폰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우진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무슨 일 있는 거지요.]

“...”

[무슨 일인데요.]

“...”

[대답 좀 해 보지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지훈이가 없어졌는데.”


다니엘의 목소리는 긁히다시피 하며 울려나왔다.


“어떤 놈이 납치를 한 거 같거든.”

[설마.]

“근데 금마가 동백꽃을 한 송이 놔두고 갔다.”

[뭐라고요.]


우진의 목소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핸드폰 너머로 짙은 침묵이 흘렀다.


[왜요. 햄은 그 때 집행에 참가도 안했잖아요.]

“예정 명단에는 있었지.”

[그게 이유가 됩니까.]

“둘 중에 하나겠지. 모르거나.”

[...]

“빠졌든 말았든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하거나.”

[말도 안 돼요.]

“말이 안 될 거는 또 뭐 있노.”


다니엘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워졌다.


“어느 쪽이든 내가 딱히 할 말은 없다.”

[그게 무슨 말인데요.]

“그 날 갔으믄, 내라고 그 일에서 발 뺄 수 있었겠나.”

[그래도 이거는...!]

“박 주사야.”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책상 서랍장 중 제일 마지막, 열쇠로 잠긴 서랍을 열고 그 속에서 총을 꺼냈다. 총 속에는 꽉 찬 탄창이 장전돼 있었다. 미처 탄을 바꾸지 못해 그 속에 장전된 탄은 대인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변이체를 살상할 때 사용하는 탄이므로 이미 살상력은 충분할 터였다.


“한 발만 떨어져서 보믄, 다 똑같을지도 모른다. 그날 간 사람들이나 내나.”

[...]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우진은 망연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어떡할 겁니까. 경찰에 말해봐야 소용없을 거고요.]

“임마, 내가 경찰 출신인데 경찰에 말할 게 뭐 있노.”


다니엘은 짧은 웃음을 흘렸다.


“통화된 김에 이야기하자. 내는 지금 나갈 거다. 니는 성우 형한테 전화해서 이 이야기 전해라. 이후 판단은 형한테 맡긴다 하더라고 전하고.”

[뭐 어짤라고요.]

“어짜기는 임마. 가야지.”


다니엘은 딱 잘라 말했다.


“아를 혼자 놔 두나.”

[무슨 일 당할 줄 알고요.]

“차라리 내가 뭔 일 당하는 게 낫다.”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잡히는 총신이 유독 무겁다고, 그는 생각했다.


“니는 그렇게 생각 안하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오래된 지하실 특유의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뒤로 꺾인 손목은 거칠고 빡빡한 줄에 묶여 있었고 입가에는 배관을 수리할 때 사용되는 은색 덕트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줄에 묶인 손목이 쓸린 것 정도를 제외하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지훈은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린 채,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가 하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깼어요?”


지훈의 신음 소리에,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정신을 잃기 전 우편함 앞에서 나누던 대화가 생각나 지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살을 태워버리는 듯 하던 통증이 다시 떠올라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놀랐죠. 미안하게 됐어요. 그렇지만 풀어줄 수는 없어.”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러나 그랬기에 더욱 섬뜩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바라는 건 학생네 형이라는 작자니까.”

“...”

“알아볼만한 표식을 남겨 놨어요. 그 놈이 오면 학생은 풀어줄게. 학생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순간 지훈은 있는 힘껏 몸을 흔들어 의자 채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갖은 발버둥을 쳤다. 남자가 인상을 쓰며 입을 막은 덕트 테이프를 뜯어냈다.


“도대체.”


지훈은 씩씩거리며 물었다.


“누구세요?”

“...”

“형한테는 왜.”

“학생, 몇 살이야?”


그는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지훈은 잠시 입을 다물고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몇 살이냐고.”

“열아홉 살요.”

“아직 어리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리 ‘나쁜 사람’ 같은 인상이 아니어서, 지훈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아무리 봐도 전기 충격기를 사용해 사람을 납치하고, 그 사람을 미끼로 다른 사람을 꾀어내는 그런 종류의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지훈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시는 거예요?”

“학생네 형이라는 그 새끼가.”


그러나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그의 인상은 달라졌다. 차분하던 인상은 싸늘하게 가라앉고 얇은 입매는 차갑게 뒤틀렸다.


“몇 년 전에 굉장히 나쁜 짓을 했어.”

“...”

“이 위에 맨션이 하나 있었어. 굉장히 오래된 낡은 맨션이.”


순간 지훈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그 언젠가 다니엘과 함께 갔던 어떤 폐허였다. 그리 경사가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차 없이 다니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 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서 발견한, 무성하게 잡초만이 돋아난 공터가. 무엇인가가 있다가 허물어진 자리인지 군데군데 다 무너진 외벽의 흔적이 남아 있던 그 곳을.


“학생네 형이랑, 그 패거리들이 몰려나와서는.”

“...”

“이 맨션에 사는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죽이고, 다치게 만들고는.”

“...”

“그것도 모자라서 불을 지르고 폭약을 터트려서, 시체도 못 찾게 만들어 버렸지.”

“...”

“그 중엔, 애까지 밴 우리 집사람도 있었고.”


지훈은 눈을 감아 버렸다. 이 맨션에는 스물아홉 명인가가 살았다고 했다. 반 정도가 죽고, 반 정도가 다치고, 실종된 사람이 두 명인가 있었다고. 이 사람은,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사람일까.


“형이 그런 게 아니에요.”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학생네 형이 우리 애 엄마를 죽인 건 아닐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어쨌든, 전부 한통속이었어.”

“아니야.”

“다 똑같은 놈들이야.”

“아니라고!”


지훈은 악을 썼다.


“형은, 여기 오지 않았어요.”

“...”

“아저씨가 무슨 얘기하는지 저도 알아요.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형은 여기 오지 않았어요. 올 예정이었는데 전날 다치는 바람에 못 왔다고... 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

“형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는 싱거울 만큼 순순히 지훈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데, 뭐가 달라?”


그는 그렇게 물었다. 순간 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섬뜩할 만큼 차분하고 찬찬하게, 그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물어왔다.


“학생네 형은, 여기 왔으면, 과연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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