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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91

17. A Little Less Conversation 2

지훈은 3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오피스텔에서 편의점까지는 10분이면 충분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다 감안한다손 쳐도 그랬다.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간이 20분이나 지났지만, 다니엘은 잠자코 텔레비전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에게도 혼자 있을 시간은 필요하니까.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30분이 넘어가는 순간, 다니엘의 생각은 바뀌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바뀌었다. 야, 니는 과자를 사러 갔나 만들러 갔나. 그 정도의 농담이나 건네려던 그의 생각은, 지훈의 핸드폰이 꺼져 있음을 안 순간 차디차게 식었다.


뭔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꽂힌 순간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가는 내내, 그는 저도 모를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은 험하다. 특히나 그가 알고 있는 세상은 더욱 더 그랬다. 당장, 지훈의 혈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시설이나 본청에서 사람을 보내 지훈을 반 강제로 끌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게, 왜 애를 혼자 내보냈을까.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긴 것 같은 시간이 지나고,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다니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성큼성큼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는 가만히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오피스텔 입구, 우편함 앞에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봉투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속에 든 것은 감자칩 한 봉지와 밀크 초콜릿 하나, 햄에그 샌드위치 한 개와 민트향 립밤이었다. 그 립밤은 지훈이 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순간 이상한 예감이 의식을 관통했다.


다니엘은 바닥에 떨어진 비닐봉투를 주워 들고 편의점으로 갔다. 늘 이 시간쯤 가게를 보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이 눈에 띄었다. 이 편의점에서 일한 지 반 년 정도 지난, 꽤 오래된 직원이었다.


“말씀 좀.”


다니엘의 음성은 평소보다 한참 낮게 가라앉았다.


“혹시 좀 전에 여기서 이런 물건 사간 남자애, 기억납니까. 키가 한 이 정도 되고, 하늘색 스트라이프 있는 티셔츠 입었고요,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아, 네.”


다니엘이 카운터에 부려놓은 물건들을 들여다보던 아르바이트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20분? 25분? 정도 된 거 같은데요. 이 드라마 시작할 때쯤 왔으니까.”


그는 핸드폰으로 보고 있던 드라마 화면을 가리켜 보였다.


“알겠습니다.”


다니엘은 비닐봉투를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지훈은 집에서 나오자마자 편의점으로 왔다. 이 물건들을 고르는데 5분 이상이 걸렸을 리는 없으니 지훈은 여기서 이 물건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사라진 것이다.


순간 다니엘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비닐봉투 속에서 밀크 초콜릿을 꺼냈다. 단 것을 먹지 못하는 지훈이 초콜릿을 산 이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순간 눈 앞이 아득해졌다.






보안실에 가서 CCTV 기록을 요청했다. 사람이 없어진 것 같다는 말에 경비원은 기겁을 하며 녹화된 CCTV 화면을 보여주었다. 대충 그의 예상대로였다. 지훈은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꺼내다가 화면에 반 정도밖에 찍히지 않은 누군가에게 시선을 주고,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불쑥 튀어나온 상대의 손에 들린 전기 충격기에 닿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화면의 각도가 빗맞아, 지훈을 끌고 가는 상대의 모습은 제대로 찍혀 있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경비원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자리에 버티고 앉은 채 CCTV 화면을 끝없이 리와인드해 돌려보았다.


“...”


일반적인 납치, 혹은 유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유괴의 대상이 되기에, 지훈은 나이가 많다. 열아홉 살이나 먹은 소년은 신체적으로는 성인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범인의 전신이 CCTV에 찍힌 것은 아니지만, 화면에 찍힌 팔의 길이 등으로 미루어봤을 때 175에서 178 정도의 신장으로 추측이 가능했다. 특별히 몸집이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체격조건이라면 지훈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납치해서 돈을 받아내는 게 목적이라면, 더 쉽고 간단한 상대는 얼마든지 있었다.


두 번째, 본청의 소행.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본청 사람들이 쉬는 날을 희생해가며 여기까지 와서 지훈을 데려갔으리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TFT 사람들이 2, 3개월에 한 번씩이나마 당직이니 뭐니 출근해서 힘들게 일하는 동안도, 본청과 시설 쪽 사람들은 소위 빨간 날은 죽어도 출근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훈의 혈청이 탐이 나긴 하겠지만, 문자로나마 사전 통보 한 마디 없이 이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 또한 규정에 죽고 규정에 사는 ‘공무원’이었으므로.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원한에 의한 납치인 경우.


차라리 가능성이 높다면 이쪽일 것이다. 이제 겨우 열아홉 살 먹는 지훈이 납치씩이나 당할 만큼의 원한을 산 일 따위가 있을 리가 없으니, 원한이 있다면 자신 쪽에 가까울 것이었다. 자신에게로 포커스가 맞춰지는 순간, 머릿속에 순식간에 너무나 많은 얼굴이 떠올라 다니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믄.”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좀 적당히 살 걸 그랬제.”


지훈이 들고 있던 비닐봉투는 우편함 앞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지훈을 감쪽같이 납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비닐봉투부터 치웠을 것이다. 그걸 그대로 둔 것도, CCTV를 가리거나 망가뜨리거나 완전히 피하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누군가가 지훈이 납치된 것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문득, 얼마 전 9분서에서 집행관 하나가 린치를 당해 사망에 이른 일이 떠올랐다. 지훈이 우편함 앞에서 납치되었다는 사실도 다니엘의 불안감을 가속시켰다. 카드 고지서를 가져오겠다던 지훈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자신의 명의로 나온 카드고지서를 손에 든 지훈은, 누가 봐도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거라면.


“...”


다니엘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훈이 사라진 지는 얼추 30여분이었다. 그 시간동안 도망칠 수 있는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미쳐 날뛰는 심장을 추스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거실 안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자꾸만 불길한 쪽으로 달리려는 예감은, 이 것이 사실을 직시하는 것인지 냉정을 잃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괴로웠다.


린치라면, 그런 거라면, 목표는 어차피 나일 테니까.


집행관들을 린치하려는 미전이자들은 원래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쓸데없이 사람을 상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 자가 지훈을 어떻게 생각하고 납치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 지훈은 제 3자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유인하려는 목적에서 납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지훈은 살아있을 것이다.


실은, 그래야만 했다.


“...”


비닐봉투 안에,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하나 들어 있었다. 동백꽃이었다. 생화는 아니고 조화였는데, 군데군데 색이 바래고 꽃잎이 찢겨 있었다. 다니엘은 그 동백꽃을 한참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편의점에서 팔 만한 물건은 아니었고, 동시에 살 만한 물건도 아니었다. 그런 거라면 결론은 한 가지 뿐이었다.


범인이 일부러 넣어둔 것이라는.


“동백꽃...”


그 꽃의 이름은 어쩐지 불길한 여운을 가져왔다. 다니엘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대가 전화를 받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 왜요. 지훈이가 계속 안 놀아줍니까.]

“박 주사.”


우진을 부르는 다니엘의 목소리에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내가 지금 좀 가물가물한 게 한 가지 있는데.”

[무슨 일인데요.]

“니.”


순간 담배가 말렸다. 다니엘은 손을 뻗어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XX 맨션 방역조였다고 했제.”

[...]


핸드폰 너머의 감이 순간 확 줄어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가 흐르던 우진의 음성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예.]

“그라믄 그 맨션 가봤겠네.”

[당연히 가 봤지요.]

“내가 기억하기로.”


다니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 또한 본래는 그 맨션에 집행차 가기로 되어 있었다. 전에 없는 대규모의 작전이어서 건물의 도면과 구조도를 놓고 미팅만 여러 번 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보았던 사진들, 영상들, VR들이 머리 속에 천천히 떠올라왔다.


“그 맨션 옆벽에, 무슨 꽃 모양이 있었다고 안 했나?”

[있었지요.]


우진은 대답했다.


[동백꽃 모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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