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90

17. A Little Less Conversation 1

쉬는 날의 다니엘은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점심시간 가까운 시간까지 늦잠을 자는 것은 기본이고, 밥조차 잘 챙겨먹지 않아 배달 음식 따위로 때우기가 일쑤였다. 청소는 2주에 한 번 꼴로 청소기를 미는 정도였고 그나마 빨래만은 하지 않으면 다음 주에 입고 출근할 옷이 없으니 억지로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게으름의 소치라기보다는 업무에 너무나 지쳐버린 나머지일 것이 분명해서, 지훈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야 낸데, 니는 심심하겠다.”


소파에 널브러진 채 개봉 시기를 놓친 영화를 보며, 다니엘은 문득 그렇게 말했다.


“한참 나가서 놀고 싶을 나이 아이가.”

“나가서 뭐하고 노는데.”

“뭐든 간에.”


다니엘은 고개를 들고 지훈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집 안에만 처박혀 있기는 아까운 나이 아이가.”

“내가 애야?”

“그라믄, 어른이가.”

“어른 돼서야 하는 걸 두 가지나 하니까, 어른이지.”

“어른 돼서야 하는 게 뭔데.”

“하나는 취직해서 돈 버는 거. 알바 말고.”

“음. 그라고 다른 거는.”

“...”


지훈은 말없이 웃었다. 그런 지훈을 쳐다보던 다니엘도 피식거리며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웃기만 했다.


“뭔데.”

“...”

“아 뭔데.”

“...”

“말 안 하나.”

“다 알고 물어보는 건 대답 안 해.”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모르면 말고. 그런 게 있어요. 되게 좋은 거.”


지훈은 손가락으로 아래 눈꺼풀을 끌어내리며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나 편의점 갈 건데, 뭐 사올 거 없어요?”

“내는 됐다.”


그렇게 대답하고, 다니엘은 다시 한 번 지훈을 쳐다보았다.


“꼭 필요한 거 아니믄 내일 담배 사러 갈 때 같이 나가든지.”

“그냥 후딱 갔다 올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신으며 지훈은 대답했다.


“이 참에 바람도 좀 쐬고. 우편함에 카드 명세서 같은 거 와 있던데 그것도 좀 가져오고.”






역시나, 말은 그렇게 해도 집에만 있는 게 좀이 쑤시는 거겠지. 현관문 밖으로 사라지는 지훈을 보며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훈의 원래 성격이 어땠는지, 다니엘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집에 오고 난 후의 지훈은 지나칠 만큼 매사 조심하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잘 말하지 않는 성격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을 겪은 여파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이기도 할 것이고, 아마도 두 가지 모두일 것이었다.


지훈은 의심할 여지없이 의젓했고, 의연했다. 그 나이 또래는 물론이고 어른도 겪어내기 힘든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지훈은 오히려 곁에서 지켜보는 자신보다 더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지훈의 모습은 때로는 기특하고 흐뭇하다가도 때로는 가슴을 에어내는 듯 쓰리기도 했다. 벌써 이 집에 오고 난 후 몇 번의 주말을 지냈으면서도 주말에 뭘 하자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그의 마음 씀은 단연 후자였다.


“좀 나가 볼까.”


꼼짝도 하지 않고 집에만 처박혀 주말을 보낸 것이 제법 오래였다. 막상 나가보려고 마음을 먹어도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핸드폰을 들고, 다니엘은 이런 저런 키워드를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그 때 느닷없이 우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밀히는 벨이 한 번 정도 울리고 바로 끊긴 것이었지만. 다니엘은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서너 번 울리고, 우진은 전화를 받았다.


“방금 뭔데.”

[잘못 걸었습니다.]

“니는 임마, 주말에 집에 처박혀서 핸드폰이나 쳐다보고 있나.”

[누가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는데요. 여가 집인지 밖인지 사무관님이 어째 압니까.]

“니가 집 말고 가 있을 데가 어디 있노.”

[그거야 두고 봐야 알지요. 그라는 사무관님은 뭐한다고 잘못 걸린 전화에 일일이 콜백합니까. 이 금쪽같은 주말에.]


우진은 피식 웃었다.


[지훈이가 안 놀아줍니까.]

“어. 안 놀아준다. 젊은 아 건사하기 힘드네.”

[그러게 누가 띠동갑 비슷하게 먹는 아하고 연애질하라대요. 사람이 기본적인 양심이 있어야지. 도둑놈 소리 들어도 싼 거 알지요.]


거기까지 말해놓고 우진은 한참을 웃었다. 다니엘도 피식거리며 따라 웃었다.


[거창한 거 뭐 할 필요 있습니까. 좀 있으믄 해도 지는데 어디 야경 좋은 데로 드라이브라도 가세요. 사무관님도 그 핑계 대고 바람 쐬고 그라는 거지 뭐.]

“그게 낫겠나.”

[주말에 사람 많은 데 가는 거는, 그거는 아무리 그래도 할 짓 아니잖아요. 지훈이도 사람 구경하러 다니는 거 딱히 좋아할 거 같지는 않고.]

“그거는 그렇지. 알았다. 쉬어라. 야동 적당히 보고.”

[보는 거 아니고 찍는 중입니다. 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긴 인사도 남기지 않고 끊어져 버리는 우진의 전화였다. 다니엘은 피식 웃으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어디 보자...”

[주말 페르세우스 유성우 시간당 최대 90~100개]


포탈의 첫 페이지에 들어가니 대번에 이런 기사가 눈에 띄었다. 유성우라는 것은 퍽이나 자주 오는 것 같으면서도, 또 매번 몇 십 년에 한 번이니 몇 백 년에 한 번이니 하는 타이틀이 붙어 있어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한 번씩은 꼭꼭 클릭해 보곤 하게 되던 것을 다니엘은 기억했다.


“어디 조용한 데 가서 별이나 보다 올까.”


간만에 마음에 드는 계획이었다.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아, 지훈은 소소한 군것질 거리 몇 가지와 자주 트는 입술에 바를 립 밤을 샀다. 다니엘의 말마따나 지금 당장 급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소소하게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오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지훈은 우편함 앞에 서서 우편함에 꽂혀 있는 우편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카드 명세서가 한 건, 관리비 고지서가 한 건, 그 외의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우편물이 두 건 정도 있었다.


“저기.”


우편물을 챙기는 지훈을, 누군가가 등 뒤에서 불렀다. 지훈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과 그다지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짙은 회색의 후드 티셔츠에 눌러 쓴 모자챙의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져, 이목구비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혹시, 강다니엘 씨 아세요?”

“네?


지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같은 집에 사는데요.”

“아.”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떻게 되는 사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


지훈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경우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 놓은 모범답안이 없어서 그의 대답은 전에 없이 굼떴다.


“동생인데요.”

“친동생?”

“아니 뭐 친동생은 아니고...”


대답을 하려다말고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 것들을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일까.


“그런데 무슨 일...”


그러나 다음 순간, 지훈은 목덜미에 뜨끔한 충격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10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