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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88

16. To Be or Not To Be 4

민현을 그토록 고민하게 했던 것이 지훈의 거취와 맞바꾼 성우의 안전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니엘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주말, 힘든 집행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다짜고짜 품으로 뛰어들던 지훈의 얼굴과 그 뒤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민현의 모습이 눈 앞을 스쳐갔다.


그러니까, 그 일은 그렇게 된 거였다.


“그래서, 황 선배는요.”

[좀 전에 잠들었다. 눈 퉁퉁 붓도록 울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울기는 뭐한다고 울어요.”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도 못하고 다니엘은 소리 내어 혀를 찼다.


“참 사람 답답하다. 그런 거를 그래 혼자 껴안고.”

[답답하지.]


핸드폰 너머 성우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어떡하냐. 내가 꽂힌 건 그런 황민현인데.]

“잘났습니다.”


툭 내뱉듯 한 마디 해 놓고 다니엘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이거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됩니까.”

[...]

“이 새끼들 이거 완전 상습범이잖아. 지훈이 걸고 넘어진 게 이번이 벌써 두 번째 아니에요?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황 선배한테까지 그러고.”

[가만히 좀 있어. 지금 내가 너보다 더 빡치니까.]


성우의 목소리가 낮고 차갑게 울려 나왔다. 다니엘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일단 지훈이한테 이 얘기 해 줘라.]

“예.”


다니엘은 무겁게 대답했다.


“황 선배가 지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금마도 알아야지요.”

[그런 게 아냐. 그런 이유 같으면 말할 필요 없어. 황 선생도 바라지 않을 거고.]

“그라믄.”

[이 새끼들 또 이런 식으로 지훈이 건드릴 거다. 벌써 전적도 있잖아.]


성우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훈이한테 단단히 일러 둬. 그 새끼들이 뭐라든, 절대로 들으면 안 된다고. 황 선생 눈물 뺀 거 본전은 찾아야지.]






다니엘에게서 이야기를 다 들은 지훈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뜬 채, 그는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니엘은 말없이 그런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은.”


다니엘은 담배 한 대를 뽑아 입에 물었다.


“니는 진짜로 괴물 같은 거 아니다 하는 게 증명됐다. 그러니까.”

“...”

“앞으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알았나.”

“응.”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

“근데,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말을 안 하는데 니가 어째 알겠노. 그 속을.”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황샘하고 10년 넘게 안 내도 몰랐고 황샘 좋아하는 성우 형도 몰랐다. 그거를 어린 니가 어째 알겠노.”

“그래도.”


지훈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너무 행복해서 그런 거 아니시냐고 그랬는데.”

“...”

“그 얘기 들으면서 황 선생님 되게 마음 많이 아프셨겠다...”

“괜찮다.”


다니엘은 숙여진 지훈의 정수리를 손 끝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사람이 사는 거는, 적당하게 서로 마음 아프게도 하고, 폐도 끼치고, 그라믄서 사는 거다.”

“...”

“언제가 될지 몰라도, 황샘도 니 마음 아프게 하는 날이 있을 거다. 그라믄 그때, 이 빚이다 생각하고 넘어가 주믄 된다. 알겠나.”


아무리 그래도 내키지 않는 듯, 지훈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훈은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 피가, 치료제 만드는 데 도움이 되면.”

“...”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지훈아.”

“나만 살자고... 이러는 건...”

“내가.”


다니엘은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니 또 그래 생각할까 봐, 이 이야기 하는 거다.”

“...”

“니가 할 수 있는 일이믄, 하는 게 맞다. 시설에서 정식으로 공문 보내서, 니한테 니 혈청이 치료제 개발에 필요하니까 몸에 무리가 안 가는 선에서 일정 분량만큼만 헌혈해 달라 하믄, 그거는 하는 게 맞다. 사람이믄 그래야 된다.”


다니엘은 지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점마들이 니한테 바라는 거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러면.”

“그런 공식적인 방법을 안 통하고, 황샘한테 그런 말을 한 거는.”

“...”

“니를 몰래, 뒷구멍으로 끌고 가서, 아무한테도 안 알려주고 몇 명만 연구해서 그 성과를 독차지하겠다 하는 속셈이 있는 거다.”


그는 딱 잘라 그렇게 말했다.


“그런 개수작은 두 번 들을 필요도 없다. 알겠나.”

“...”

“뭐를 가지고, 무슨 말을 해도 들으믄 안 된다. 황샘한테처럼, 니가 이 연구에 응하믄 내를 여기서 내보내준다는 말을 해도 들으믄 안 된다.”


다니엘은 지훈의 두 뺨을 붙잡고, 멍하게 흔들리는 지훈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황샘 말마따나 스무 살도 안 된 니 하나 못 지키믄서 세상을 구한다는 거는, 그거는 다 거짓말이다. 알겠제.”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 저 편으로 조용한 한숨 소리가 한 번 들렸을 뿐이었다. 늦은 저녁 잠에 들었다 깨어난 새벽, 발작하듯 건 전화에 응답한 우진이 민현의 이야기에 대해 보인 반응은 그랬다.


“미안해.”


민현은 덮어놓고 말했다.


[뭐가요.]

“내 맘대로 그런 거 결정해서.”


성우 하나의 일이었다면 오히려 가벼웠을지도 모른다. 다니엘과 우진의 목숨도 함께 걸려 있는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소년 하나의 목숨과, 몇 년째 동고동락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숨은, 과연 같은 저울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민현의 고민은 그 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일로 외근조는, 앞으로도 많이 위험해질 지도 몰라.”

[됐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우진의 대답은 짧았고, 망설임이 없었다.


[스무 살도 안 된 머스마 잡아먹고 편한 일 돌믄, 밤에 두 다리 뻗고 잠이나 자겠습니까. 그런 거 취미 없습니다. 내만 그런 거는 아닐 건데요.]

“...”

[그라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새끼들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는데요.]


우진은 피식 웃었다.


[사람 목숨 가지고 그따위 개소리하는 새끼들이믄, 지훈이 끌고 가 놓고 입 싹 닦지 마란 법도 없다 아입니까. 이 일 아는 거 껄끄럽다고 더 이상한 일로 돌릴지도 모르고요. 지훈이가 우리 분서에 있으믄, 최소한 그라지는 못하겠지요.]

“...”


민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의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는 우진이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뭐가.”


민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번에 약속했잖아. 언젠가, 내 입으로 말한다고. 그 약속은 지켜야지.”

[사무관님.]

“응.”

[소질 없는 소리 한 마디만 할게요.]

“뭔데?”

[제가 사무관님 억수로 많이 사랑하는 거 아시지요. 주무세요.]


나직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우진은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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