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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86

16. To Be or Not To Be 2

오늘 취합할 데이터는 무려 세 개 분서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집행하는 환경과 상황은 제각기 다 다르기 때문에 그 데이터들을 일괄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값은 많이 달라질 수가 있어서, 이 부분은 언제나 민현을 신경쓰이게 했다.


“선생님.”

“...”

“선생님.”

“어? 응. 왜?”


지훈이 부르는 목소리에 민현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좀 전에 나가셨을 때 시설에서 전화 왔었는데요.”

“시설에서?”

“주신 보고서 수치가 한 줄씩 밀리셨다고.”

“뭐?”


민현은 허둥지둥 데스크탑을 뒤져 파일을 열었다. 봉소 내 산소 밀도 및 벌 페로몬 농도에 관한 보고서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보고서에 인용된 수치가 중간에 한 번 중첩되더니 그 뒤로 줄줄이 한 줄씩 밀려 있었다.


“미치겠다, 진짜.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는 거야.”


민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나갔을 때는 자판기에 커피 가루가 떨어져 프림과 설탕만 탄 맹물이 나온 것을 모르고 반 잔 가까이나 마시다가 뒤늦게야 깨달았다. 이래서야,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민현의 얼굴은 잠시 어두워졌다.


“응 알았어. 내가 전화할게. 고마워.”


민현은 하던 작업을 접어놓고 틀린 수치를 고치기 시작했다. 별다른 작업도 아니고 이미 추출해놓은 데이터를 옮겨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을, 초보도 안 할 이런 실수를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저기 선생님.”


옆 자리에 앉은 지훈이 조심스레 민현을 돌아보았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시죠?”

“응?”


민현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요새 나사가 하나 풀리긴 한 모양이네. 박 주사도 모자라서 박 서기한테까지 그런 말을 다 듣고. 박 주사도 어제 그러더라. 어디 뭐 죽을병이라도 걸리셨냐고.”


괜한 말을 했나 싶었던지 지훈은 움찔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는요.”

“...”

“그냥 선생님이 요즘 너무 행복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민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야?”

“저는 가끔씩 새삼스럽게, 이거 꿈일까 싶을 때가 있거든요. 저는 형 좋아하고 형도 저 좋아한다는 사실이요. 그거 되게 어려운 거잖아요.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는 거요.”


거기까지 말해 놓고, 지훈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선생님이랑 분서장님은 더 오래 되셨을 거니까요.”

“...”

“그렇게 조심스러워하다가 잘 되셨으니까, 그냥 마냥 행복하신 거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민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못할 말이라도 한 듯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지훈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누가 무슨 말이라도 해?”


한참 후에야,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지훈에게 물었다.


“강 사무관이? 나 좀 이상해졌다고 그래?”

“그 정도는 아니고요.”


지훈은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어, 평소 선생님 안 같다고.”


가뜩이나 입 바른 다니엘이 고작 그 정도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딴에는 자신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지훈이 열심히 골라낸 말이 그 정도일 것이라는 생각에 민현은 피식 웃었다.


“이래서 늦바람이 무섭다는 거지.”

“네?”

“별 말 아냐. 늦게 시작한 연애질 때문에 정신이 나갔다는 거지. 뭐가 앞인지, 뭐가 뒤인지도 모르고.”


민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근데 지훈아.”

“네.”

“다니엘 많이 좋니?”

“...”


순간 지훈의 얼굴은 화단에 핀 꽃처럼 붉어졌다. 그의 대답은 한참만에, 느리지만 분명하게 나왔다.


“네.”

“그렇구나.”


어떡하지, 지훈아.

난 그런 네게, 정말로 못할 짓을 하게 되겠구나.

이렇게나 나를 믿고 있는 너에게.






집행을 마치고 방역 요청을 한 후, 언제나처럼 집 밖으로 나오는 성우와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방역 키트를 챙겨든 우진이었다. 집행 다음 절차가 방역이긴 해도 그들이 현장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박 주사 여기까진 웬일이야?”

“웬일은요. 집행 다음이 방역인데.”

“아니 그래도. 보통 집행 끝나고 한참 지나야 오지 않나.”

“뭐 좀 일찍 나왔습니다. 사무실에 뭉개고 있기도 싫고. 요새 행정 일을 박 서기가 알아서 잘 하니까 딱히 할 일도 없고.”


우진은 흘끗, 성우 곁의 다니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뭐, 강 사무관님도 기본적인 눈치는 있으실 거니까, 그냥 계시는 데서 이야기할게요.”

“뭔 일인데.”

“두 분 다, 눈치 채셨지요.”


우진은 떼어놓고 그렇게 말했다.


“요새 황 사무관님 뭔 일 있는 거요.”

“...”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한 사람의 생각은 착각일 수 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세 사람이나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결국 아직 어린 지훈을 제외한 분서 내의 모든 사람이, 민현의 이상 징후를 눈치 채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제가 어제 두 분 나간 틈에 질렀습니다. 죽을병이라도 걸리셨냐고.”

“박 주사.”

“뭔 일 있기는 있는 모양이던데요. 지금은 말 못한다고, 나중에 말해주께 그라시던데.”

“...”

“분서장님 뭐 짚이는 거 없습니까.”

“...”


한참을 생각하다가, 성우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들 잘 알잖아. 워낙에 그런 거 말하고 다니는 성격 아닌 거.”

“말 안하는 성격이라고 저래 가만 냅둘 겁니까.”


우진은 내뱉듯이 말했다.


“사람이 울고 싶은데 차마 못 울 때는 이 핑계 대고라도 울어라고 뺨 한 대 때려줄 줄도 알아야 됩니다. 좋아하는 사이 같으믄 더 그렇겠지요.”

“...”

“자기가 자기 입으로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 좋지요. 신사적이고. 그런데 자기 입으로는 먼저 하기 힘든 말이라는 것도 안 있겠습니까.”

“그라고, 황 선배 같은 사람이 먼저 말 못 꺼내고 속앓이 하는 이야기 같으믄 그거 꽤 심각한 일일 수도 있어요.”

“맞지요.”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라도 말해 줄 생각 들믄 말해주셔야 된다고 말은 그래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애인보다 순위가 앞이믄 되겠습니까. 말할라믄 분서장님한테 먼저 하는 게 맞지요.”

“그거는 그래요.”


다니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도 황 선배 성격 알잖아요. 도대체 뭔 일인지 모르겠는데 저래 놔두믄 자기 혼자 싸안고 시름시름 앓다가 안 그래도 마른 사람 더 마를 건데 그 꼴을 어떻게 볼라고요.”

“...”


성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겠다는 기분이었다.






+. 트위터 02님께서 팬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https://twitter.com/peachS202/status/91056191173271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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