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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84

15. 변이실패 5

“좋은 아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민현의 목소리는 밝다 못해 높기까지 했다.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민현에게로 쏠렸다.


“커피나 한 잔씩들 먹자.”


민현은 분서원들의 책상 위에 1층 카페에서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놓아주었다. 한 잔씩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놓아주는 그 손놀림은 가벼웠고,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황 사무관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오늘 기분 되게 좋아 보이시네요.”

“간만에 집에서 하루 푹 잤잖아.”


민현은 제 몫의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빨아 마시고 대답했다.


“역시 사람은 하루에 여덟 시간은 자 줘야 돼. 수면부채 그게 은근히 사람 잡는다니까.”

“어제 아프시다더니, 좀 괜찮으세요?”

“응, 그게 다 잠 못 자서 생긴 병이지 뭐야. 하루만 푹 자도 훨씬 나은데.”


민현은 천성이 어둡거나 음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말이 많거나 수다스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오늘 아침, 이토록이나 말이 많은 그는 어딘가 좀 낯설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어서 분서원 모두는 어딘지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커피도 돌렸으니까, 다들 주목. 나 할 말 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현은 명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민현에게로 모였다.


“뭐 새삼스레 이런 말 하는 거 좀 웃긴데.”


민현은 파티션 너머 성우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 우리 분서장 좋아해.”

“...”

“...”

“...”

“...”


순간 사무실 안은 멍한 침묵이 흘렀다.


이 좁고 작은 사무실 안에, 거창한 비밀이 사라진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거의 매일 목숨을 내놓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그만큼이나 서로를 인간적으로 아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우가 민현을 좋아한다는 것, 민현이 성우를 좋아한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 쯤은 누가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민현이 입을 열어 그 사실을 공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뭐야 이 분위기는.”


민현은 얼어붙은 분서원들을 휙 둘러보며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가 남자 좋대서 징그럽기라도 하냐?”

“...”

“박수는 못 쳐줄망정, 그런 얼빠진 얼굴로 쳐다들 볼 거야?”

“...”

“아무튼 나는 분명히 공개적으로 얘기했어.”


민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니까 앞으로 분서장한테 까불고 개기고 애먹이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다들 알았어?”






“나 좀 놀랐어.”


보통 집행팀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점심도 같이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성우는 민현과 밥을 먹으러 가고, 다니엘은 지훈과 밥을 먹으러 왔다. 우진은 정말인지 아닌지 총무과에 볼 일이 있다며 먼저 나가 버렸다.


“황 선생님 갑자기 그러셔 가지고.”


다니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인데도, 그의 안색이 어딘가 밝지 못한 것이 지훈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역시 지난 주말에 얘기가 잘 되신 걸까요?”

“글쎄.”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그런 거면 좋겠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좀 쎄하다.”


거기까지 말해놓고 다니엘은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둘이 그냥 좋아서 저라는 거믄 다행인데.”

“...”

“왜 내한테는 황샘이 자꾸 오바하는 거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에이.”


괜히 제가 더 섭섭해져 지훈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그리고,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오버하는 게 어딨어.”

“그런가.”

“그렇잖아요. 난 그냥 좋기만 하던데.”


자신이 다니엘을 좋아해서, 다니엘이 자신을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만큼이나 분명히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자꾸만 엇나가는 성우와 민현을 바라보는 것은 지훈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지난 주말 힘든 집행을 마치고 돌아온 성우를 외면하는 민현을 보며 알 수 없는 안타까움과 불안함을 느꼈고, 오늘 그 일로 더 이상은 그럴 일이 생기지는 않겠다 싶어 마냥 기쁠 뿐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분명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미안하시지 않았을까요.”


지훈은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황 선생님도 분서장님이 자기 좋아하는 거 알고 계셨다면서요. 황 선생님도 분서장님 좋아하셨고. 그런데도 너무 오래 못 받아줬으니까. 그게 미안하면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글쎄, 그런 거믄 좋겠는데.”


다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분서에서 황샘 제일 오래 안 게 낸데, 몰라. 오늘 아침에 황샘은, 어딘가 좀, 붕 떠 있다고 해야 되나 오바한다고 해야 되나. 하여튼 별로 그 양반 같지가 않더라. 그거 되게 신경 쓰이는데.”


다니엘은 버릇처럼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는 말이 있다. 그런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무슨 일이야.”

“뭐가.”


민현은 고개를 들고,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 도대체 오늘 왜 그래?”

“내가 뭘.”


민현은 성우의 손등에 손을 얹고는 그 손등을 손 끝으로 가만히 쓸었다.


“좋아서 좋아하는 티 내는 게, 뭐 이상해?”

“그런 말이 아니라.”


성우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나 더 머뭇거리던 그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당신.”

“그 말은, 어째 좀 섭섭하다?”


민현은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나 좋아하는 거 티 내도 되고, 나는 너 좋아하는 티 내면 안 되고, 뭐 그런 의미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런 말 맞는데.”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그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는 성우의 태도가 너무나 깔끔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간 다 알고도 모른척 했던 그 세월은 너무나 길었고, 황량했다. 차마 돌아보고픈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성우야.”

“...”


순간 뜨끔 놀란 시선이 민현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런 식으로 성우를 불러본 적이 거의 없었다. 늘 직함이나 분서장 같은 딱딱한 이름으로만 불러왔기에.


“내가, 너 좋아하는 게 이상해?”

“아니, 내 말은.”

“네가 말은 먼저 했는데.”


민현은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너 많이 좋아해.”

“...”

“그거, 이제부터라도 안 숨기기로 했을 뿐이야. 이상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돌려지는 시선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몇 밤을 자고 일어나도 이 모든 일이 정신 산란한 꿈이 될 수 없음을 새삼 깨달은 어젯밤, 민현은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물론 최선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것은 물론 차선조차도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런 결정밖에는 내릴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는 내게 실망할까. 어쩌면 원망할지도.


그러나

그렇더라도

너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이런 결정밖에는 내릴 수가 없어서.


이 불온한 평화는 얼마동안이나 버틸 수 있을까. 민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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