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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82

15. 변이실패 3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 안에는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작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질린다.”


민현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일로 트라우마 생겨서 케이크 한 입을 못 먹는 애한테 20 브릭스나 되는 설탕물을 먹이고, 네가 이 최면에 응하지 않으면 니네 분서원들 다 해체시킬 거라고 협박한 게 한 몇 년 전 일인 거 같나 보지?”

“황민현 사무관.”

“사람이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


민현은 대뜸 그렇게 쏘아붙였다.


“그게 그렇게나 정정당당하고 떳떳한 일이면,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서 혈청검사를 하자고 해. 이런 식으로 음습하게 굴지 말고.”

“...”

“지난번에는 사무실 쳐들어와서 애를 납치하듯이 끌고 가서 협박하더니, 이번엔 나한테야? 일을 이런 식으로밖에 못해?”

“어이구.”


서기관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분개하는 게 당연하지.”

“무슨 말이야, 그건.”

“황민현 사무관.”


서기관은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뭐가, 너무 쉽게 풀려간다는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알아듣게 말해. 너하고 스무고개하자고 붙들려 있는 거 아니니까.”

“별 말은 아니고.”


분개한 민현이 무색할 만큼, 서기관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부이사관님이 XX 맨션 일 따위의 어설픈 협박에 순순히 물러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서기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스른 후, 소름끼칠만큼 냉정한 눈으로 민현을 바라보았다.


“박지훈은 오래 전부터 윗전에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 녹취 따위로 넘어가려는 어설픈 수작 부리기 전부터도.”

“그게 무슨 말이야.”


민현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박 서기의 녹취 자료는...”

“아, 물론 전혀 도움이 안 됐다는 말은 아니야. 그것도 꽤 도움이 되긴 했지. 치료제 개발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됐다는 거지만.”


지훈의 녹취 자료.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도모하려 했던 모든 일들을, 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뱅뱅 돌려 말하는 것도 참 성미 안 맞네.”


서기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툭 터놓고 말하지. 윗분들은 처음부터 박지훈의 기억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 지난번에도 최면을 빙자해서 데려다 놓고 혈청을 검사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분서장부터가 나서서 방해하는 바람에 그렇게 못하게 됐지만.”

“...”

“방해를 하는 것도 모자라서 다 지나간 옛날 일까지 들쑤시니까.”


서기관은 그 쯤에서 입을 다물고, 민현을 바라보았다.


“지난 주말에, 그런 일정이 잡힌 거야.”

“너 설마.”


민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래. 그간 워낙에 찍힐 짓을 많이 했으니까, 미워서 그런 일거리 배정한 거라는 것 정도는 다들 알았어.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는 얘길 하고 있는 거야?”

“그 공장은 내부에 작업 공간이 세 개가 있어.”


서기관은 대답했다.


“그리고 그 공간 하나하나에 다 헥사곤이 형성되어 있었지.”

“...”

“집행팀이 그걸 일일이 확인하다 보면 나갔던 변이체들을 맞닥뜨리게 될 테고. 그 다음은, 뭐.”

“뭐.”


민현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은 그보다 더 일그러졌다.


“그 다음은, 뭐.”

“...”

“대답 안 해?”

“진정해.”


서기관은 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민현에게 진정하라는 듯한 손짓을 해 보였다.


“그렇게 골치 아픈 외근조만 없어지면, 너는 어디든 다른 데서 연구를 시키면 될 테고. 박지훈은 데려다가 혈청 실험에 투입하면 될 거였고.”

“...”

“그런데 뭐, 세상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서 말이지.”

“...”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는 한 조직의 상부에서 그 구성원들을 ‘고의로’ 사지로 내몰았다는 말이었다. 무능력이나 부지의 소치가 아니라, 정말로 뚜렷한 악의를 가지고.


“도대체 이런 말을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야?”


민현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나한테서,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걸 받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부이사관님은 너를 설득해 보라고 하셨어. 네가 박지훈을 잘 설득해서 이 실험에 응하게 하면 너도 이 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거지. 그야말로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라고 말이야. 연구자라면 누구나 탐낼 기회라고.”

“터진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

“조선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지금처럼, 뭔가를 두들겨 패는 데 익숙지 않은 자신의 손을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민현은 치를 떠는 표정으로 서기관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렸어. 그 친구는 그런 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

“그래서, 다른 딜을 제안할까 해.”

“딜?”

“그래.”


서기관의 눈이 똑바로 민현을 향했다.


“옹성우 분서장.”

“뭐?”

“너무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 뭔가를 마음에 둔 사람은, 그 낌새를 꽤나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게 마련이니까.”


서기관의 목소리는 느리고도 차분하게 민현의 의식에 들어와 꽂혔다.


“박지훈이 너한테 보내는 신뢰가 꽤 각별하다지.”

“...”

“어차피 추가 녹취를, 요식 상으로라도 진행할 예정이었잖아. 그 때 녹취 말고 혈청 검사를 하자는 거지. 네가 하는 말이면 박지훈은 무조건 따를 거고, 설령 이 일이 새어나간대도 다른 분서원들이 방해를 하거나 하지도 않겠지.”

“...”

“그렇게만 해 주면.”

“...”

“옹성우 분서장을, 이 일에서 해방시켜주지. 시설 같은 데 연금도 하지 않고, 아주 자유롭게. 물론 어느 정도의 비밀유지 서약은 필요하겠지만, 그런 걸 떠벌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우리도 잘 아니까.”

“...”


민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입 속에서 들끓는 그 수많은 욕지거리 중, 어느 것 하나도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 봤잖아. 이 일이 어떤 일인지. 지난 주말은 어떻게, 운이 좋아서 살아 돌아왔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그 분서는 이미 윗전에 찍힌 상태고, 이런 위험한 일들만 자꾸 맡게 될 텐데.”

“이봐.”

“옹성우 분서장, 일 잘 하지. 판단력 좋고, 실력 있고, 냉정하고, 그러면서 인간미도 있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라고, 이런 일에 자꾸 내몰렸을 때, 무조건 안전하다는 보장이 있을까.”

“...”


민현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서기관은 연민 어린 눈빛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좋게 생각해.”


그는 미소를 지었다.


“세상을 구하는 일이잖아.”






어떻게 차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민현은 시트 등받이에 쓰러지듯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에,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려 차라리 멀미에 가까운 어지럼증이 일었다. 눈 앞이 흐릿했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를 않았다.


밀폐된 차 안에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하필이면, 오늘 지훈이 선물해 준 차량 디퓨져의 향기였다. 룸미러에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유리병은 불빛을 받아 소년의 눈동자처럼 빛났다.


괴로웠다.


민현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그리고 맥이 빠진 손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전화에 응답하기 직전에야 떠올랐다. 지금 사무실에는 지훈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이.


[11분서 행정관 박지훈입니다.]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보세요?]

“...”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지훈아.

...성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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