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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80

15. 변이실패 1

월요일 오전의 11분서는 거의 전원이 시말서 작성으로 분주했다. 내근조 중에서도 민현까지 열 스캔 데이터 해석 및 대처 미흡과 교신 유지 실패에 따른 시말서를 써야 해서, 이 시말서 대란에서 자유로운 것은 지훈 뿐이었다.


“오늘 메인 이벤트는 누구야?”

“아무래도 박 주사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럴 거 같습니다.”


어디 남의 일이라도 이야기하듯, 대꾸하는 우진의 목소리는 태평스럽기까지 했다.


“얼추 잡아도 TNT 과다 사용에, 전파 교란에, 그거 또 뉴스 난 거에, 인근 농가에서 민원 들어온 거에, 트럭 하나 불러야 되겠네요.”

“살겠나.”

“뭐 장사 하루 이틀 합니까.”


우진은 오늘 아침에 민현이 사다 돌린 막대 사탕의 포장지를 벗겨 입 속으로 굴리며 대답했다.


“전파 교란 말고는 다 전과가 있어서, 날짜나 바꾸고 줄거리나 좀 바꿔서 써내믄 됩니다. 시말서 많이 써버릇 하니 이럴 때는 좋네요.”

“조심해라.”


성우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날짜 바꿔서 써낼 거면 좀 꼼꼼하게 보고, 다 바꿔. 저번에 어느 놈이야? 앞장 날짜 뒷장 날짜 다른 것도 모자라서 집행지 주소도 반 틀리게 적어가지고 한 건으로 시말서 두 번 쓴 놈이.”


민현과 우진의 시선이 일제히 다니엘을 향했다. 다니엘은 그런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 모니터 앞쪽으로 바짝 붙어 앉아 고개를 수그렸다.


“아서라. 그런다고 숨어지냐, 그 덩치에.”

“이거는 뭐 덤불에 머리 처박고 지 눈에 지 안 보이믄 남 눈에도 안 보이는 줄 아는 타조 새끼도 아니고요.”

“왜. 강 사무관이 다리는 좀 길잖아. 우리 분서에서 제일 길지 않나.”

“다리 긴 것만 닮으믄 참 좋을 건데, 요령 없는 거까지 닮으셔서 그게 문제지요.”

“박 주사야, 니 오늘 너무 간다.”

“오늘 분서장님도 여왕벌 사살 때문에 시말서가 폭탄이고, 혼자 한 장 달랑 쓰고 마는 거 보니까 생으로 배가 아파서 안 그렇습니까.”


우진은 피식 웃었다. 다니엘도 따라 웃었다.


“하기야 맞제. 다른 사람들 다 시말서 폭탄 맞은 중에 내만 한 장 딱 쓰는 이런 일이 처음인 거 같은데.”

“그래서, 감개가 무량하셔?”


피식 웃던 민현의 시선이 옆자리 지훈을 향했다.


“박 서기.”


민현이 지훈을 불렀다. 앞에 놓인 사탕을 집어 포장을 벗기며,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왕따 시켜서 미안해. 시말서 작성이란 게 당 떨어지면 하기 힘든 일이라서.”

“아니요, 괜찮은데요.”


지훈은 웃었다.


“다음에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 그걸로 퉁칠게요.”

“그러자.”


민현은 키보드를 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성우를 바라보았다.


“분서장.”


민현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면담 좀.”






“박 주사 니는 주말에 뭐했노?”


다 쓴 시말서를 다시 한 번 훑어보며 다니엘이 물었다.


“하다못해 잠깐 차 세우고 얼굴이라도 비치고 가지, 내는 점마 저거 어데 다쳐가지고 저래 꽁지 빠지게 도망가나 생각했다 아이가.”

“이쁘지도 안한 얼굴 피차 봐서 뭐할라고요.”


우진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하기는 뭐합니까. 밀린 잠 자고 밀린 청소하고 밀린 빨래하고 밀린 살림하고.”

“맞나. 역시 허리 다쳐도 아쉬운 사람 없는 거 맞제.”

“혼자 한다는 말은 안했습니다.”

“그 좋은 주말에 집구석 처박혀서 밀린 빨래하고 밀린 청소하고 하는 거 같이 해 줄만큼 성질 좋은 사람이 잘 있드나.”

“청소만 하고 빨래만 하믄 그렇겠지요. 중간중간 딴 짓하느라 하루 종일 걸리고,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 듣는 데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시작은 사무관님이 했다 아입니까.”


우진은 피식 웃으며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무관님은 주말에 뭐했는데요.”


파티션 너머 다니엘의 시선과 지훈의 시선이 마주쳤다.


“성묘 갔다 왔다.”

“성묘요?”

“어. 예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

“아.”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건설적인 일 좀 하셨네요.”

“간만에 핸드폰 꺼놓고 밖에 나갔다 오니까, 그것도 괜찮대. 홀가분하고.”

“그치요.”


우진은 웃었다.


“핸드폰 저거만 없어도 아마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는 반 이상 줄어들 겁니다.”






성우는 잠자코, 민현이 건네는 자판기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의 입에는 조금 달다 싶기는 했지만, 날마다 신경이 갈려나가는 이런 조건 하에서 마시기에는 또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도 싶었다.


“오늘도 나가지?”

“그렇지 뭐.”

“언제 나가?”

“늘 비슷해. 조금 있다가. 지금 쓰는 거나 마무리해서 결재 올려놓고 나가야지.”


민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몇 군데나?”

“두 건. 뭐 무난하지.”

“주말에 사람을 그렇게 고생시켰으면 오늘 같은 날은 좀 빼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그게 불가능한 판인 거 잘 알면서 그래.”


성우는 피식 웃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민현은 고개를 저었다. 민현을 가장 기운 빠지게 하는 것은 지난 주말의 그 엄청난 건을 ‘해결’이 아닌 ‘과잉방역’으로 보고 있는 윗전의 태도였다. 여왕벌이 있었고, 열 기나 되는 변이체가 있었고, 번식을 시도한 정황이 확인되며 헥사곤 구조물 수천 개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해도 그들의 그런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일아들을 의사 자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민현은 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나도 이따가 외근.”


민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시설에서 연락이 왔어. 좀 재미난 데이터가 나왔다나 봐. 얼마만큼 재미있을지는 모르지만.”


거기까지 말해놓고 민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치료제의 핵심 기전이 될 지도 모른다나.”

“그런 굉장한 말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해?”

“늑대가 나타났다.”


민현은 거기까지 말하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 두 번이지.”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소위 ‘시설’에도 이 미증유의 질병을 고치는 획기적인 방법을 개발해 내 적게는 노벨 의학상을 받고 길게는 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공명욕으로 가득 찬 학자들과 연구자들이 득시글거렸다. 그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IMS의 발병 기전을 알아냈다든가 치료법 개발의 실마리를 잡았다든가 하는 리포트를 경쟁적으로 올려댔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석 달 안에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런 장단에 놀아나는 것은 끔찍하리만큼 피곤한 일이었지만, 만의 하나 정도의 가능성이라도 놓칠 수는 없어서 매번 소집에 응하고 있는 민현이었다.


“언제 나가? 점심 먹고 나가지?”

“아마도.”

“그럼 내가 먼저 나가겠네. 조심해서 잘 갔다 와.”


흐릿한 미소를 짓고 돌아서는 성우의 소매를, 민현의 손 끝이 멈칫 붙잡았다. 그러나 그 손끝은 소매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주르륵 소매를 타고 미끄러져, 성우의 손등에 살짝 부딪혔다.


“저기.”

“...”

“조심해.”

“...”


대답 대신, 성우는 민현의 차디찬 손 끝을 한번 꽉 붙잡았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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