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79

14. no signal 4

“형.”


다음날, 간만에 허리가 아파 저절로 잠이 깨질 만큼 늦잠을 자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는 핑계로 오후 늦도록 뒹굴다가 배달음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주중에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보면서 실없는 웃음을 흘리던 중, 지훈은 문득 다니엘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 소원이 두 가지 있는데. 말해도 돼?”

“뭔데.”

“첫 번째는.”


지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 여기 오기 전에, 경찰일 때 쓰던 물건 중에, 별로 많이 안 소중한 거 하나만 줘요.”

“그거는 왜.”

“빨리.”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서랍을 열어 한참을 뒤적이던 그는, 뭔가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뭐, 이런 거?”


지훈은 다니엘이 내미는 것을 받아들고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무궁화 모양의 견장이었다. 꽤나 오래된 것인 모양으로, 본래는 꽤나 반짝거렸을 광택이 다 죽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이게 뭔데요?”

“견장이다. 제복 어깨에 붙이는 거.”

“무궁화 한 개면, 계급이 뭐야?”

“경위.”


강다니엘 경위.


지훈은 입속으로 그 낯선 관등성명을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TFT 오믄서 제복도 반납할라고 꺼내놨는데, 그게 똑 떨어지더라. 새로 붙여서 내놓기도 귀찮고, 그래서 제복만 반납하고 그냥 가지고 있었던 거다.”

“이거, 나 줘도 돼?”

“경찰 때 쓰던 거 달라매.”

“그러니까.”


지훈은 재우쳐 물었다.


“나 줘버리고 다시는 안 봐도 괜찮은 거예요?”

“내가 다시 경찰될 일도 없고, 그게 뭔 필요가 있겠노.”


다니엘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봤다 아이가.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얼른 못 찾는 거.”

“응. 그럼 됐어요.”


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첫 번째고, 그라믄 두 번째 소원은 뭔데.”

“두번째 소원이 뭐냐면.”


지훈은 늘어져 앉아있던 자세가 무색하리만큼 가볍게 몸을 놀려 벌떡 일어났다.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요.”






지훈이 다니엘을 끌고 간 것은 한강 둔치의 산책로였다.


일요일 밤 시간의 둔치에는 드문드문 인적이 있었다. 잔디밭에 자리를 펴고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이어폰을 꽂은 채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었다.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사람 등등 적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근처에 흩어져 있었다.


“여기는 왜.”


다니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훈을 돌아보았다. 다짜고짜 끌려나와 운전까지 해서 온 장소치고는, 그다지 멀지도 않고 호젓하지도 않고 별다른 의미가 있어보이지도 않아서, 그는 적이 당황한 것 같았다.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장소가 어딜까 하는 걸 생각해 봤어.”


지훈은 멀리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유명한 건물이라도 없어질 수도 있고, 다시 지을 수도 있고,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만 한강은 안 그럴 거니까.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니까, 답이 여기뿐이었어.”


지훈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나는 아까 다니엘에게서 받은 무궁화 견장, 하나는 분홍색 토끼 모양이 달린 핸드폰 키스트랩이었다. 그것은 지훈이 핸드폰에 매달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이거.”


지훈은 키스트랩을 다니엘에게 보여주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이상할 거까지는 아닌데, 머스마가 갖고 다닐 만한 물건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원래 누나 거였어요.”


지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누나가 되게 마음에 들어 하던 거여서, 괜히 뺏아서 내가 가지고 다녔어. 나 키가, 진짜 많이도 말고 딱 5센티만 더 컸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는데, 그 말 할 때마다 누나가 남자애가 고 3이면 클 만큼 다 큰 거라고, 너는 이제 거기서 1센티도 더 안 클 거라고 놀리는 거야. 그게 너무 얄미워서... 그랬어.”


지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덕분에, 누나 유품이 돼 버렸는데.”

“...”


다니엘의 미간이 가만히 찌푸려졌다. 어렴풋하게나마, 지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응.”


아직 묻지도 않은 말에, 지훈은 먼저 대답했다.


“이거랑 내 핸드폰, 우리 집에서 갖고 나온 유일한 물건이에요.”

“니, 그런 거를 어떡할라고.”

“형.”


지훈은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형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죠.”

“뭐를.”

“그 때 돌아가신 분들, 어디 무덤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


순간, 마음 한 구석을 푹 찔린 느낌이 들어 다니엘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훈은 피하지도 않고 순식간에 굳어진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


지훈의 입은 더디게 열렸다.


“여기다가.”

“...”

“묻자.”

“...”

“형이랑 같이 일하시던 분들이랑, 우리 식구들이랑.”


순간, 무언가 부드럽고 가벼운 것으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일었다. 묻는다. 여기다가. 그런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사람한테는 추억이 필요하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여도, 마음이 고되면 찾아가서 울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는 있어야 한대.”


지훈의 커다란 눈은 한 번 깜빡여지지도 않고 똑바로 다니엘을 향했다.


“그 분들도, 우리 식구들도, 어디 계신지 모르니까.”

“...”

“그냥, 여기다가, 묻어요.”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사라지지 않을 곳.

마음이 고된 날 언제든 찾아와서 울 수 있으려면, 쉽사리 바뀌거나 사라지는 장소여서는 곤란하니까.


“자.”


지훈은 다니엘의 손에 견장을 쥐어주었다.


“하나 둘 셋 하면 던지는 거야. 알았지.”


다니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장을 움켜쥔 손등으로 힘줄이 돋아났다.


“하나, 둘, 셋.”


두 사람은 지훈의 구호에 따라 어둡게 찰랑이는 강물 속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아니, 묻었다. 묻고 싶어도 묻을 수 없었던 것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묻을 수가 없었고, 묻을 수가 없었기에 잊을 수도 없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고, 그 무언가를 삼켜버린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절하자.”


지훈은 두 손을 모으고, 방금 전 키스트랩이 날아간 방향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다니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펴고 거수를 올렸다.


“경위 강다니엘.”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제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살아지는 만큼 열심히 살겠습니다.


“업무상 전출을 명 받아, 이에 신고합니다.”






+. 루히만 퍼플은 완결 후 소장본 제본을 검토중입니다. 조만간 수요조사 폼 올릴게요.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23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