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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76

14. no signal 1

해야 할 일이 아주 깔끔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지훈은 오늘 하루 종일 일을 거의 하지 못했다. 외근조가 집행방역을 나간 동안은 속을 끓이느라고, 모든 일이 무사히 마무리된 것을 알고 나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리해야 하는 목록 하나를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숫자를 틀려 짜증스레 고치고 또 고치고 하던 참이었다.


[나가자.]


다니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훈은 슬그머니 고개를 움츠리고는 곁에 앉은 민현과 성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이 냉랭한 공기는, 지훈으로서는 상당히 의외였다. 아까 모니터를 바라보던 민현의 반응으로 봐서 오늘은 분명히 뭔가 진전이 있으리라 기대했었는데, 정작 성우가 돌아온 이후 민현의 반응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차갑고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나 일 아직 다 안 끝났어요.]


지훈은 서둘러 답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선생님이랑 분서장님 어째 분위기가.]

[그러니까 나가자고.]


그러나 다니엘의 메시지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우리가 자리를 피해줘야 저 사람들도 얘기를 하지.]






“별 일 없었나.”


며칠 전이 월급날이었다. 지훈은 일한 날을 일할 계산하여 4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첫 월급으로 받았다. 됐으니까 너나 쓰라고, 정 생활비를 내고 싶으면 제대로 월급 다 받는 다음 달부터나 생각해 보자는 다니엘 때문에 결국은 생활비는 내지 못했다. 다니엘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동안, 지훈은 1층 로비의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왔다. 지훈이 집어주는 커피를 마시고 컵 홀더에 다시 꽂아놓으며, 다니엘은 비로소 그렇게 물었다.


“나야 별일 있을 게 어딨어요.”


지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험한 일 하고 온 사람이 고생했지 뭐.”

“그게 꼭 그렇지도 않다.”


흘끗 옆을 돌아보며 다니엘은 웃었다.


“지옥은 직접 그 속에 떨어진 사람한테도 있지만.”

“...”

“옆에서 지켜보믄서 속 태우는 사람 마음 속에 있기도 한 거다.”


순간 아까의 막막함이 다시 가슴 속을 치받아, 지훈은 지그시 매워 오는 눈시울을 참기 위해 콧잔등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근데 참 의외에요.”


지훈은 중얼거렸다.


“뭐가?”

“아까 선생님, 분서장님 걱정 되게 많이 하셨는데.”

“...”

“그래서 오늘은, 분서장님 돌아오시면, 뭐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우진이 교신을 끊어버린 후, 떨리는 손 끝으로 모니터 화면을 쓸어내리던 민현의 얼굴은 지훈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종류의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은 민현 역시 자신이 다니엘을 걱정하는 그것과 정확히 같은 마음으로 성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 언젠가 민현이 스스로의 입으로 고백한, ‘좋아한다’는 말과도 조금은 그 궤를 달리하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종류의 어떤 것이었다.


“원래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뭐가 그래 복잡하다.”


다니엘은 지나는 말 비슷하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똑같이 화를 내도, 진짜 화나서 화낼 때도 있고, 쪽팔려서 화낼 때도 있고, 찔려서 화낼 때도 있고, 서럽거나 슬퍼서 화낼 때도 있고.”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흘끗 시선을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니는 아직 그래 때 묻은 어른이 아니라서, 아까 그래 내를 반가워해 준 거다.”

“...”


어쩐지 머쓱한 생각이 들어 지훈은 커피를 집는 척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 참. 박 주사님은요.”

“집에 갔다. 아까 방역 마치고 바로.”

“그래도 돼요? 보고서는요.”

“뭐 지 알아서 하겠지.”


다니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 할 거는 잘 알아서 하는 놈이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라. 그라고.”


다니엘은 말 끝에 피식 웃었다.


“금마 그거, 아마 대충 눈치 채고 자리 피한 걸 거다.”

“눈치?”

“니랑 내도 있고, 사무실에 두 양반도 그렇고.”

“아.”

“그래 안 보여도, 금마가 눈치 하나는 억수로 빠르다.”

“그런 거 같았어.”


지훈은 웃었다.


“오늘 그 상황에 드론 띄워가지고 재밍 건다는 건, 잘은 모르지만 아무나 생각할 수는 없는 거 같았는데.”

“금마 그거 그런 거 잘한다.”


다니엘 또한 커피를 집어들며 따라 웃었다.


“예전에 한 번은, 성우 형이 뭔 일이 있어서 집행을 못 가고 금마하고 둘이 나간 적이 있었는데 화염방사기가 오작동을 해서 작동이 안 된 적이 있었다. 사실 우리 일은, 집행만큼이나 방역도 중요하다 아이가.”

“그래서요.”

“그냥 불 지르는 게 목적이믄 등유나 휘발유 대충 뿌려서 불지르믄 되는데, 집을 다 태워야 된다 아이가.”

“그렇겠죠.”

“그래서 금마 그게 어쨌는고 하믄, 내보고 라이터 좀 내놔봐라 해 가지고 살충제 노즐 입구에 라이터를 붙이대. 그래 하믄, 살충제 가스가 나오다가 불을 타가지고 불이 유체상태로 분사된다. 그걸로 화염방사기 대용으로 쓰더라. 내가 그거 보고 좀 놀랬다.”

“쩐다.”

“뭐 대충 그런 놈이다.”


다니엘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다니엘은 가방을 풀지도 않고 대충 던져 놓은 후 침대에 활개를 쭉 뻗고 누워버렸다.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털썩 드러누운 바람에 침대 매트리스가 크게 한 번 요동쳤다.


“아, 씨발. 돼 죽겠네.”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일로 온나. 좀 눕자.”

“씻고 누워요. 피곤할 건데.”

“일로 좀 온나.”


다음 순간 지훈은 다니엘의 손에 손목을 잡혀 옆으로 끌려갔다. 입으로는 피곤하다면서도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는 완력은 하나도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아이고 지훈아, 내 죽겠다.”


다니엘은 옆으로 몸을 틀어 지훈을 품 속에 가두고 다리를 옭아매었다. 그것은 사람을 끌어안는다기보다는 푹신한 베개나 인형을 껴안는 듯한 자세였다.


“숨 막혀.”


어깨를 밀어내고 턱을 위로 쳐들어, 지훈은 가까스로 숨 쉴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신의 온 몸을 껴안은 그의 체온이 싫지 않아 지훈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눈을 감은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시고.”

“일곱 시 조금 넘었는데.”

“씨발 피같은 주말이 반이나 갔네.”


다니엘은 입 속으로 투덜거렷다.


“가서 핸드폰 좀 가져 온나. 니 꺼 내 꺼 두 개 다.”

“응.”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 두 개를 가지고 침대 앞으로 돌아왔다.


“핸드폰 꺼라.”

“응?”

“핸드폰 끄라고.”


잠시 머뭇거리던 지훈은 전원 버튼을 눌러 핸드폰 두 대를 모두 꺼버렸다. 새까맣게 화면이 죽은 핸드폰은 어쩐지 보기가 생경했다.


“아까 우진이가 집에 가믄서 뭐라 했는고 하믄, 오늘부터 월요일 출근 전까지 잠수할 거니까 전화 걸면 3대 9족이 재수 옴 붙을 거라 하더라.”


다니엘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우리도 그거 함 해보게.”






+. Ruhemann's Purple 트리비아 15

14에서 말씀드린 그 엔딩은 4부를 쓸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갈 예정이었습니다. 4부에서 하프를 사살하고 베란다에서 혼자 담배 피우는 다니엘을 지훈이 안아주는 장면을 기억하실까요. 그 장면에서 다니엘이 지훈에게 안긴 채로 '하루 참 길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트리비아 14에서 나온 '사는 게, 참 되다'라는 말로 연결될 예정이었습니다.

결국 4부에서 하프를 사살한 다니엘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는 지훈과, 분서원들을 지키기 위해서 녹취에 응하는 지훈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다니엘의 감정선이 생기면서 이 엔딩은 각하. 너무 잔인한 결말이 될 것 같았습니다. 루히만 퍼플의 다니엘과 지훈이 빠져들 수 있었던 슬픈 결말 중 하나 정도로만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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