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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75

13. Burn It Up 8

우진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먼저 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차를 몰아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도 기분이 그지없이 찜찜했다. 결국 다니엘은 비상등을 켜고 차를 옆으로 붙여 세웠다. 사실 다니는 차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한 산길이었지만.


“먼저 내려가세요.”


다니엘은 성우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임마 이거 오는 거 보고 내려가야 되겠는데.”

[차 세우자.]


성우 또한 그렇게 말했다.


[없는 소리 하는 취미는 없는 놈이긴 한데, 확인은 하고 가야 발이 떨어지겠다.]

“그러지요.”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근처 갓길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수 초 후, 발 아래가 뒤흔들릴 정도의 폭음이 울렸다. 두 사람은 굳어진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니엘은 핸드폰을 꺼내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또 전화질입니까. 지훈이한테는 연락했어요?]

“임마, 니는.”

[내가 말했잖아요. 내는 있지요, 여는 내한테 맡기고 먼저 가라 이런 거 안합니다. 미쳤습니까. 남 대신 죽게.]


핸드폰 너머 우진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정도 터트렸는데, 변이체 아니라 외계인이라도 못 살아납니다. 방역 끝났습니다. 오늘 욕보셨네요.]

“...”


그제야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어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니도 고생했다. 오늘 니가 제일 욕봤네.”

[뭐 그거는 사실인 거 같습니다.]


우진은 사양하지도 않고 대뜸 그렇게 대꾸했다.


[혹시 분서장님 옆에 있습니까.]


다니엘은 성우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성우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저 여서 바로 퇴근합니다. 그래도 되지요.]

“그래라, 씨발.”


성우는 피식 웃었다.


“오늘 고생했고, 푹 쉬어.”

[안 그래도 그럴라고요.]


우진의 목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저 오늘부터 월요일 출근 전까지 잠수합니다. 핸드폰 꺼놓을 겁니다. 그 사이 전화하는 사람은 3대 9족이 재수 없을 거니까 그래들 아세요.]


그 말을 하는 사이, 우진의 SUV가 쌩하니 두 사람이 차를 세워놓은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거 두 분도 대충 하고 빨리 퇴근하세요. 뭐 먹고 살 일 났다고 그래 목숨 걸고 충성합니까.]






토요일이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출근을 하지 않은 TFT 건물 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다니엘이 먼저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도 그리 떠들썩하던 사무실은 아니었지만 사무실 안은 너무 조용해서 안으로 발을 디디는 것이 꺼려질 정도였다. 그 심각한 분위기에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목을 짐짓 움츠렸다.


“들어왔습...”


그러나 다니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지훈이 대뜸 튀어나와 다니엘의 허리를 껴안았다.


“지훈아.”


허리를 둘러 깍지를 껴 붙든 팔에는 전에 없이 완강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품 속에 고개를 파묻은 지훈은 다니엘을 껴안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품 속에 숨은 것 같이도 보였다. 다니엘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지훈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나 지훈은 품 속에 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야, 니는.”


그러나 다음 순간 다니엘은 멈칫했다. 지훈의 얼굴이 닿은 명치 언저리의 옷깃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어서였다. 당황해서 얼굴이라도 들여다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지훈은 다니엘의 품 속에 고개를 파묻고 하염없이 안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고만 울어라. 누구 죽었나.”

“놔 둬.”


민현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뭐, 두 사람 사이 모르는 사람 있는 것도 아니고.”


민현은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지훈이 속 많이 태웠어.”


그 말만 남기고, 그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성우는 한참 다니엘과 민현이 나가버린 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다니엘은 제 품에 고개를 처박은 지훈을 껴안고 가만히 뒷덜미를 쓸었다. 머리칼을 헤집고 삼켜버린 흐느낌에 들먹거리는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게 한참을 다독이고 나서야, 지훈은 겨우 고개를 들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옷자락에 묻어 들어온 건파우더와 먼지가 옮겨 묻어 엉망이 된 얼굴에 눈물이 흘러, 지훈의 뺨은 순식간에 얼룩덜룩하게 변해 있었다.


“뭐고, 이게.”


다니엘은 손 끝으로 지훈의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쳤다. 먼지가 섞인 눈물이 밀려나 뺨에 뿌연 자국을 남겼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눈가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걱정했드나.”

“...”


지훈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차마 말도 나오지 않는 듯, 그냥 연거푸 고개만 끄덕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 사이로 억지로 눌러 참고 있는 흐느낌 소리가 흐릿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약속했다 아이가. 니 놔두고는 죽어도 안 죽는다고.”

“...”


도저히 안 되겠던지 지훈은 다시 다니엘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들썩거리던 어깨는 급기야 잘게 떨리기까지 했다. 제 품 속에서 어린 새처럼 팔딱거리는 여리고 어린 심장의 박동이 아파서, 다니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다. 다 끝났다.”


물론, 이런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다니엘은 눈물이 그치지 않는 지훈의 눈꺼풀 위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라. 가슴 아프다.”


또다시 이런 순간이 오더라도

이런 네가, 나를 지킬 테니까.






다니엘과 지훈이 먼저 퇴근하고, 두 사람만이 남은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민현은 민현대로, 성우는 성우대로 각자 작성해야 할 서류작업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민현 뿐이었다. 사실 성우는 벌써 한참 전에 제 몫의 보고서 작성을 끝낸 후였다.


성우는 가만히 시선을 돌려 민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어쩐지,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까 지훈이 다니엘에게 한 것처럼 솔직하게는 아니라도,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한 마디 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황 선생, 안 들어가냐?”

“...”


민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느 때보다도 한층 싸늘하고 굳어진 표정으로, 그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성우는 제풀에 머쓱해져 입을 다물었다.


설마, 아무렇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걱정했을 것이고, 속을 끓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아마 저렇게 화가 난 것일 거라고 성우는 생각했다. 지금껏 민현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기에.


그러나, 그런 것을 민현의 탓으로 돌릴 수만도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보낸 자신의 마음은, 그리 뜨겁지도 않았고 애절하지도 않았다. 내용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뜨거움과 애절함을 그에게 도저히 강요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뭐 그렇다고.


그런 애매한 말밖에 할 수가 없었던 것은

결국,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런 순간들 뿐이기 때문에.


성우는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

“주말 잘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갑작스레 밀려들어 눈 앞이 아찔해졌다.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고 성우는 생각했다. 식전이었지만 밥조차 귀찮았다.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실컷 자고 싶다는 것이, 지금의 가장 솔직한 마음이었다.


“있어 봐.”


막 한 발을 떼려는 성우의 뒤통수를, 민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때리고 지나갔다.


“나 조금만 더 쓰면 이거 마무리니까.”

“...”

“같이 가. 집에.”


순간 뜨끔,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지금 자신이 알아들은 것이 정말 그런 건지 아닌지, 성우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정말로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증명해 버린 오늘 같은 날,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차마 믿을 수가 없어서.


“방향 다르지 않나?”

“말 못 알아들어?”


두 줄의 책상과, 그 위로 얹힌 모니터들, 온갖 서류철들,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지난한 삶을 넘어, 두 사람의 시선이 천천히 마주쳤다.


“같이 가자고. 집에.”






+. Ruhemann's Purple 트리비아 14.

처음 시작할 당시 정해두었던 루히만 퍼플의 엔딩은 지훈이 사실은 감염이 된 상태였고 굉장히 오래 잠복해 있다가 증상이 드러나는 특이 케이스였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니엘이 지훈을 죽이고 자살하는 엔딩이었습니다.

이렇게 오픈하는 건, 이렇게는 안 쓴다는 얘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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