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72

13. Burn It Up 5

그 말을 끝으로, 채널에 연결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는 현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으로 등을 떠민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같은 편이라는 사실, 두 가지 모두가 각자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한숨 소리조차 잦아든 채널은 무겁게 가라앉아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전쟁에 나간 군인은 적의 총에 죽는 것이 절반, 등 뒤에서 날아온 아군의 총에 죽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라던가.


“이 분위기 뭡니까.”


그 침묵을 깬 것은 우진이었다.


“강 사무관님이 몰랐던 사실 말한 것도 아니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

“여기, 높은 양반들이 우리 분서 이뻐하는 줄 알았던 순진한 사람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것도 아니면서.”

“...”

“뒈져라 한다고 순순히 뒈질 겁니까. 재미없게.”

[박 주사 말이 맞아. 일단, 눈 앞의 현상에 집중하자.]


채널 너머에서 입을 여는 민현의 목소리에도 어느덧 날이 서 있었다.


[일단 왕대 속을 확인해 봐. 거기가 비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니면.]

“알겠습니다.”


우진이 포켓에서 아미 나이프를 꺼냈다. 왕대의 겉을 덮은 섬유질은 강도는 약했지만 몹시 끈적끈적했다. 베어낸다기보다는 겉을 찔러 떼어내자, 그 내부가 들여다보였다.


왕대 속에는 우윳빛의 점액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점액질의 한 가운데, 문제의 ‘여왕벌’이 잠들어 있었다. 키가 대략 160cm 내외로 보이는 그 개체는, 정수리에 긴 더듬이가 돋아나 있었고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변이개체보다 커다란 날개를 매달고 있었다.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칼이 온 전신을 다 덮을 정도로 길었고, 목둘레 언저리로는 짧고 고른 털들이 돋아나 마치 목도리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기괴했으나, 동시에 기묘하게 아름답기도 했다.


“황 선생.”


성우가 채널에 대고 보고했다.


“뭐가 있긴 하다.”

[유충이야?]

“아니, 유충은 아니고. 변이체야.”


여왕벌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변이체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얼굴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검은 눈동자가 뿌연 눈꺼풀에 덮혀 있었다. 그 몸을 덮은 점액질에서는 희미한 단내가 나고 있었다. 그것은 봉소 내부에 진입할 때 처음으로 맡을 수 있는 역한 단내와는 조금은 그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점액질에 잠겨 있어. 여성인 거 같아. 나이는 육안으로 판별은 어렵지만 20대 정도. 날개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여.”


채널 너머에서 감감하게, 민현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여왕벌로 양육되는 중인 건가.”

[그런 거 같은데.]

“그라고 보니까.”


허공을 쏘아보던 다니엘이 흘끗 시선을 돌려 여왕벌을 한 번 바라보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이 쪽에서 탐지된 한 기가, 이거 아닐까요.”

“아마 그렇겠지.”

[그래. 생각해 보면 그 쪽이 앞뒤가 맞긴 해.]


민현이 대답했다.


[지금 변이체들에게는 우선 산란을 할 개체가 필요한 거야. 그래서 지금 왕대 속에 있는 그 개체를 여왕벌로 양육시키는 중인 거고.]

“그런 거면...”

[조심해.]


민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여왕벌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사실이 다른 개체들에게 전달되는 순간...]


순간, 점액질에 잠겨 있던 여왕벌이 눈을 떴다. 흑요석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희번덕거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인간들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턱 아래 자리한 입을 벌렸다.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귀에 꽂힌 인이어에서 소름끼치는 하울링이 울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은 인이어를 빼냈다. 어찌나 날카로운 하울링이었던지 한참이나 고막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재밍이겠지요.”

“그렇겠지.”

“이제 이쪽으로 다 몰려오겠네요.”

“안 그렇겠나.”


성우는 말없이 품에서 탄창을 꺼내 장전했다. 다니엘 또한 포켓에서 탄창을 꺼냈다. 방금의 그 재밍은, 아마도 여왕벌이 자신의 신변에 처한 위험을 동료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전파가 충돌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만간, 저 쪽에 있는 다른 변이체 네 기가 이 쪽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그것은 민현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박 주사는 일단 나가. 비무장 상태로 여기 있는 거 별로 좋은 생각 아니다.”


성우는 허공을 노려보며 다니엘에게 말했다.


“강 사무관, 일단 박 주사 나가는 거 엄호해. 박 주사는 나가서 빨리 여기 통째로 날릴 방법 강구하고.”

“알겠습니다.”


다니엘은 입구쪽 문설주에 등을 기대고 바깥을 노려보았다.


“100미터 몇 초 뛰는데.”

“14초 조금 넘습니다.”

“뭐 굼벵이 수준은 아니네.”


저 편에서 흐릿하게, 뭔가가 날개를 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장전이 끝난 총을 허공에 겨누었다.


“여기서 입구까지, 숨도 쉬지 말고 뛰가라. 알았나.”






마지막 몇 발쯤은 뛰어서 구르다시피, 우진은 일단 공장 안을 빠져 나왔다. 여왕벌의 근처에서 멀어지자 먹통이 되었던 인이어는 다시 작동을 시작했다. 민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찔렀다.


[어떻게 됐어?]

“여왕벌이 깨났어요.”


우진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마 다른 변이체를 소환한 거 같고요. 그 과정에서 재밍이 터졌습니다.”

[그랬구나. 박 주사는 나왔어?]

“예, 저는 일단 나왔습니다. 이 상황에 아무 도움이 안 되기도 하고.”

[어떡할 생각이야?]

“날릴 겁니다.”


우진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방역이고 나발이고, 뭐가 얼마만큼 더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


민현의 말이 끊어졌다. 그 침묵이 오히려 섬뜩해, 우진은 인이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든, 하나만 더 터지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큰일인데. 변이체가 공장 안에만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아. 인근 삼림지 쪽에서 추가로 다섯 기 정도가 공장으로 접근 중이야.]

“뭐라고요.”


우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5 더하기 5니까 합이 열 기네요. 씨발, 미치겠네.”


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이 정도 규모의 공장에, 자그마치 사택씩이나 있는데 근무하다가 변이된 사람이 다섯 명 뿐이라니. 그러니 총 변이한 개체는 열 기, 그 중 절반 정도는 다른 먹이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여왕벌의 소환 신호를 듣고 이리로 돌아오는 중인 모양이었다.


“황 사무관님 더 전달하실 사항 없습니까.”

[현재로는 없어. 왜?]

“교신이 한 30분 끊길 겁니다.”

[뭘 어쩌려고?]

“재밍은 저 새끼들만 하라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차 트렁크에서 케이스 하나를 꺼내 지퍼를 열었다. 그 속에는 제법 무게가 나가는 드론이 들어 있었다.


“미국 아들이 좋은 거를 하나 개발했지요. 허리케인 같은 거 와서 기지국 맛 갔을 때, 임시로 기지국 대용으로 쓸 수 있는 드론요. 혹시나 해서 하나 싣고 다니는데, 이럴 때 써먹겠네요.”

[그러니까, 핸드폰용 전자파로 재밍을 시도하려고?]

“핸드폰 기지국 근처에서는 양봉이 안 된다는 말이 옛날부터 있었지요.”

[벌의 신호체계를 핸드폰 전자파가 교란하기 때문에 그렇다고는 하는데.]

“그러니까요.”


우진은 어깨로 잔류 배터리의 양을 점검했다.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아 30분 정도는 사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 저 안에 화력 가지고 열 기나 상대 못합니다. 임시 기지국 수준의 전파에 증폭기 대믄 행동불능까지도 노려볼 만 할 겁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실제로 가능할까?]

“아까 강 사무관님 말대로지요. 되믄 좋고.”


배터리팩을 움켜쥐는 우진의 손등으로 핏줄이 파랗게 불거졌다.


“안 되믄 말고.”

[...]

“일단 다 후려쳐서 떨궈 놓고, 그 다음 생각하지요.”

[박 주사.]

“교신 끊습니다.”


우진은 피식 웃었다.


“기도나 많이 해주세요.”

navyrain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8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