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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녤윙] Ruhemann's Purple 67

12. 살인자의 기억법 6

지훈이 잠에서 깬 것은 새벽 다섯 시 쯤이었다.


가슴 위로 얹힌 다니엘의 팔을 살짝 걷어내고, 지훈은 늑씬하게 뻐근한 허리를 몇 번 두드리고는 베란다로 나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그는 베란다 통유리창에 한참이나 이마를 대고 있었다.


해가 뜰 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새벽하늘은 이미 슬슬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검정에서 아주 짙은 남색 정도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고나 하면 맞을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파트 단지 안은 잠잠했다. 지훈은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불과 얼마 전까지도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이 어둠에 잠겨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써 일났나.”


뒤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대꾸도 하기 전에, 더운 체온이 등 뒤로 끼쳤다. 다니엘은 지훈의 두어발 뒤까지 걸어와 덥석 지훈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 어깨에 턱을 괴었다. 뺨을 간질이는 그 머리칼에서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났다.


“아이고 허리야.”


탁하게 잠긴 목소리로 그는 중얼거렸다.


“있제, 앞으로 웬만하면 침대 없는 데서는 좀 참자. 젊은 니는 몰라도, 내는 힘들다.”

“뭐래.”

“사람이 서른 살 넘으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아저씨 같아.”

“뭐, 임마. 그라믄 내가 아저씨지 오빠야가.”


다니엘은 지훈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지훈의 옆머리에 콩 하고 머리를 부딪혔다.


“니도 처음에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이가.”


하긴, 그랬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다니엘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어깨에 검은 자국이 묻어났다. 지훈은 슬쩍 몸을 틀어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그의 오른쪽 뺨에는 어제 묻힌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젯밤에는 분명 심각했는데, 지금 보니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지훈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데.”

“그냥.”

“그냥이 어딨노, 그냥이. 말 안하나.”


다짜고짜 어깨를 붙든 채로 옆구리를 간질이는 바람에 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엄살스레 몇 번 손을 내젓고, 지훈은 웃다 못해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실토했다.


“형 거기 눈 아래 점.”

“그게 왜.”

“우리 엄마가, 옛날에 그랬어. 눈 아래 점 있으면 그게 눈물을 빨아먹어서 울 일이 자꾸 생긴대.”

“그래서.”


되묻는 음성은 따뜻했다.


“보기 싫어서, 가린 거가.”

“응.”


다니엘은 손등으로 눈 아래 묻은 그을음을 훔쳤다. 덕분에 검은 자국이 길게 번져, 무대 화장이라도 한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너거 어머니는 그래 말씀하셨는갑지. 우리 엄마는 이거 미인점이라 하든데.”

“뭐?”

“내가 청순가련하다 안하드나.”


다니엘은 뚱한 표정으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은 뭐고. 내는 미인점 있으믄 안되나.”

“아니 그게 아니구.”


같은 점을 보고도 눈물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미인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삶의 모든 부분이, 어쩌면 대개 그러하듯이.


“그렇게 부르기도 하는구나 싶어서.”

“우리 엄마는 그래 부르더라. 그래서 니는 딸래미도 아니면서 뭐 이런 데 점 있냐고 구박 많이 당했다.”

“그래. 그냥 미인점으로 합의 보자.”


지훈은 피식 웃었다.


“내가 형네 어머니 몫까지 많이 예뻐해 줄게. 그 점.”


지훈은 손 끝으로, 다니엘의 뺨에 묻은 미처 지워지지 않은 그을음을 훔쳐냈다. 정신을 차리고 훑어보니 두 사람 다 온 몸에 그을음이 묻어 엉망이었다. 무릎이며 팔꿈치며, 손바닥, 종아리, 심지어 목덜미까지. 그나마 좀 멀쩡한 것은 다니엘의 재킷을 깔고 누웠던 지훈의 등 정도 뿐이었다.


“나가자.”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니나 내나, 남 보는 데 다닐만한 행색이 아니네.”

“그러게.”

“좀 있으믄 일찍 나가는 사람들은 움직일 거다. 그 안에 집에 가야 안 되겠나. 좀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고 출근해야지. 이 꼬라지를 해가지고 출근할 수는 없다 아이가.”

“응.”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옷 다 버려서 어떡해.”

“빨믄 되지.”

“그을음 저런 거 잘 안 질 건데.”

“안 지믄 버리믄 되지 뭔 걱정이고.”


정말로, 고작 그 하룻밤으로 모든 것이 끝난 건지, 그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다니엘은, 어제 이 집의 문을 열고 들어와 마주친 그 순간처럼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가자.”


다니엘은 지훈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라고, 이제 다시는 오지 말자. 여기.”






“너 괜찮은 거는 맞냐?”


다니엘의 책상에 총을 내려놓으며 묻는 성우의 음성은 곱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런 성우를 빤히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장사 하루 이틀 합니까.”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닌데, 너 그러는 건 어제 처음 봤으니까 그렇지.”


성우는 영 미심쩍다는 듯 내려놓았던 총을 다시 슬쩍 집어들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예, 괜찮아요. 한 군데 빼고.”

“어디?”

“어제 형한테 까인 조인트요.”


다니엘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어제 걷어차인 정강이를 문질렀다.


“내가 평소에 형 애 많이 먹인 거는 아는데요, 사람이 치사하게 그런 타이밍에 그래 평소에 쌓인 감정 티내고 그라믄 못씁니다.”

“와, 어제 강 사무관님 분서장님한테 조인트 까였습니까. 좋은 구경 놓쳤네요.”


우진이 반색을 하며 끼어들었다.


“이왕 까는 거 한두 군데만 더 까주시지 그랬습니까.”

“왜 성우 형한테 난리고. 자신 있으믄 니가 직접 까보든지.”

“까도 됩니까. 까라믄 못 깔 줄 알고요.”

“깔라믄 재주껏 까봐라. 대신에 내가 성우 형한테는 아가리 닥치고 까여도 니한테까지야 그라겠나.”

“길고 짧은 거는 대 봐야 알지요.”

“길고 짧은 거는 딱 봐도 아는 거다.”

“둘 다 나가.”


성우는 말없이 사무실 입구 문을 가리켰다.


“나가서 까든지 까이든지 해결 보고 들어와. 안 그러면 못 들어올 줄 알아.”

“그런 게 어딨는데요.”

“그런 게 어딨습니까.”


투덜거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지훈의 눈에, 핸드폰 램프가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메시지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민현이었다.


[어제 별 일 없었어?]

[네.]


아무래도 대놓고 묻기가 곤란하다 싶은 모양이었다. 지훈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제 전화 못 드려서 죄송했어요. 그럴 상황이 좀 아니었어요.]

[아냐.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민현은 흘끗, 시선을 돌려 옆자리에 앉은 지훈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

[모르겠어요.]


지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겨우 그 정도로 모든 게 해결될 거면 애초부터 그렇게 힘들어하지도 않았겠죠.]


아직도 달콤한 것을 먹지 못하는 자신 만큼이나, 그의 마음에 새겨진 생채기도 깊을 것이었다. 그 중에는, 자신이 용서해 줄 수 없는 것들도 많을 것을, 그래서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지훈은 알았다.


[그래도]


문득, 지훈은 언젠가 우진이 사 주었던 민트맛 아이스크림을 떠올렸다. 그 아이스크림이라고 해서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도 안 달다’는 우진의 말 때문에 그는 그 아이스크림 한 컵을 무사히 다 먹을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지훈은 생각했다. 다니엘의 뺨에 있는 그 점을, 이제는 눈물점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한 것처럼.


[먼저 도망가진 않으려구요.]


잊을 수 없다면 잊혀질 때까지.

기억할 수 없다면 기억날 때까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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